화랑을 경영하던 유사장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서울에 올라오자 사업추진이 원활하지 않고 꿈자리가 사납다면서 아무래도 새로 연 화랑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는 이야기다.
" 오늘 낮에 깜박 졸다가 이상한 일을 당했어요. 누군가 벽에서 쑥 나오더니 나를 덥석 안고 가는 거예요. 그리고 시퍼런 칼을 빼들고 죽이려고 위협을 해서 아차 정신을 차렸지요."
본래 부산에서 활동하다가 그 동안 그림판매가 잘 이뤄져 서울로 사업진출을 하려는 의도로 새로 장만한 사업장이었다. 오랫동안 비어 있던 자리라서 수리비도 많이 들었다고 했다.
그날 밤 법장은 유사장의 화랑을 방문하였다. 안국동 로터리 근처의 화랑인데 길보다 약간 낮은 위치로서 약 50평 정도의 규모를 갖춘 그럴 듯한 단층 건물로서 겉으로 보기에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벽을 향하여 10분 정도 정좌하며 영의식을 집중
하자 이상한 소리와 함께 정말로 벽에서 귀신들이 나오는 것이다.
< 서그렁 저벅 저그렁 저벅 절그렁 저벅>
발자국 소리치고는 요란하고 쇠스랑을 끄는 듯한 금속성 소리도 함께 들렸다.
벽에 걸린 그림들 사이의 하얀 공간을 비집고 나오는 귀신들은 하나 같이 무장을 하고 있었다. 구식 총을 든 사람도 있고, 긴칼을 잡고 휘두르면서 나오는 이도 있다. 그리고 10명 정도 되는 무사들이 법장의 앞에 서서 가만히 노려본다. 그중 대표자 격인 듯이 보이는 자가 말을 했다.
" 여기는 아무나 와서 장사할 자리가 아니다. 건방지게 누구 허락을 받고 여기서 함부로 좌판을 벌리려고 해 ? 이 자리는 성스러운 우리의 혁명을 이루는 자리지 너희 같은 것들이 들어 설 자리가 아니란 말이다. "
이게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인지 모르겠으나 일단 들어 볼 수 밖에 없었다. 법장은 유사장을 건물 밖으로 나가라고 했다. 혹시 영매체질인 유사장이 귀신에게 빙의 되면 죽도 밥도 안되는 긴급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유사장은 가녀린 여자로서 영매가 되기 쉬운 체질을 갖춘 사람이었다. 지도자 귀신은 이어서 나에게다가 오더니 내기를 하자고 그런다. 무슨 내기인가 궁금했다.
"당신이 감히 우리의 자리를 비집고 들어온 못된 여자를 도와주려고 온 모양인데, 우리는 성스러운 자리를 짓밟는 당신이 얼마나 힘이 있는지 모르나 어쨌든 내기를 해서 뜻을 들어주든지 아니면 당신이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든지 둘중 하나를 택하시요"
섬찟했다. 수백 군데의 지박령들을 상대 해온 법장이었으나 지금껏 승부수를 내자고 대드는 귀신은 처음이었다. 아마도 그들은 생전에 틀림없는 무사들인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물러 설 수도 없는 입장이 되고만 법장은 그렇게 하자고 고개를 끄덕였다.
" 당신이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왜 여기에 있는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아내면 순순히 물러 설 것이지만 만약 아무 것도 모르고 까불면 그 때는 그냥 두지 않을 것이요. "
--- 이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 같은 것이다. 귀신들의 속임수를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런 식으로 말을 걸어서 만약 자신들이 원하는 대답이 나온다고 해도 긍정하지 않으면 그만인 것이다. 만약 정답을 알아내도 그들은 특별난 의미를 두지 않고 방해자로서 대할 것이 뻔하다.--- 그런 생각이 법장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 그래, 그렇게 하기로 하자. 그런데 내가졌을 경우 당신들의 요구는 무엇이요 ?"
" 뻔 하잖소. 목숨을 내 놓으시오. 감히 우리의 성을 침범 했으니 당연한 일이요."
귀신들은 승부를 걸어 놓고 소리 없이 사라졌다. 법장은 빨리 그들과 승부를 내야 했다.
그리고 1시간 정도 사이코메트리(과거시간 투시) 시간이 흘렀다.----------시끄러운 아우성과 피냄새가 진동했다. 길가에 새로 지은 기와집이 한 채 보이고 무슨 행사가 있는지 거기에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갑작스레 남자가 칼을 휘두른다. 이윽고 한사람이 배에 칼을 맞고 쓰러지는데 밖에서는 불이 났다고 난리 친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북쪽에서 불길이 솟아오른다. 기와집이 한 채 불타고 있다. 사람들이 불구경한다고 모여든다. 그 틈을 타서 칼을 든 사람들은 안국동과 관훈동 쪽으로 양쪽으로 갈려 흩어지고 군인들이 갑자기 몰려온다.-----음, 갑신정변시의 귀신들이로구나. 법장은 역사책에서 배운 지식이 이렇게 소중하게 쓰일 줄은 몰랐다. 촛불을 켜고 귀신들을 다시 불러 모았다. 그들은 이제 법장을 향하여 거의 대들 태세였다.
자신들이 낸 문제를 맞출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오랜만에 피냄새를 맡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 모양이다.
" 당신들은 모두 허망한 꿈에 사로 잡혀 우정국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들이지요. 아무 힘도 없는 주제에 나라를 바꿔 보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칼로서 정권을 잡아 보려는 시도를 하다가 3일만에 모두 억울하게 잡혀 죽은 정치범들 아니요 ? "
법장은 그제서야 그 건물의 위치가 대한제국 우정국청사에서 불과 몇 발자국도 떨어지지 않은 곳임을 알았다. 그 사건은 1884년의 10월에 있었던 일이니까 귀신들은 백년 이상 부근에서 서성거리면서 지박령으로 깡패행세를 해온 것이다. 그런데 귀신들은 예상했던 대로 항복하려 하지 않았다. 순식간에 전투태세로 법장을 죽이려고 달려들었다.
총이 불을 뿜고 칼이 날아 왔다. 영세계에서 벌어지는 사투는 이승에서 보다 더 잔혹하다.
<우당탕, 꽝>
촛대가 쓰러지고 난데없이 바람이 부는가 하면 전등이 흔들리는 괴현상이 계속되었다.
그런지 30분쯤 지나서야 겨우 법장은 숨을 몰아 쉴 수 있었다.
순순히 물러서지 않는 귀신들을 물리칠 때 쓰는 황금침을 15개정도 천정과 바닥 그리고 벽에 날렸다. 도쾌화술(度快和術)을 써서 그들의 혼백을 유계차원에서 음계로 쫓아내 보냈다. 도쾌화술이란 소리를 동원한 영혼 천도법인데 고음과 저음을 동시에 내여 귀기를 소멸시키는 방법이다.
한참이 지나서 유사장은 영문도 모르고 돌아 왔다. 화랑 바닥이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는 것을 보고서야 무슨 일이 있었구나 했다. 이후 거기는 조용한 자리가 되었고 지금은 오히려 장사가 잘되는 자리인지 언제나 손님들이 많이 들락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