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맘을 갖고 맘대로 산다고요 ?
정말이세요
아니죠
글케 산 사람도 없고 글케 살 사람도 없지요.
어찌 사는가에 달려 있지만 ,
거진 다가 자기 삶이랍시고 남에 삶을 살아가요.
정말 뭔가에 빠져든 셈이지요.
깨물려서 사는 거예요.
돈
자식
신조
사상
철학
취미
기호식품
못된 버릇
푹 빠진 사랑
응....
또 있지요
복수 (리벤쥐) 나
승리
판매 챔피온 달성이나
목표성 관리로
조직의 한 사람으로서 생명을 바친다 등등
그런대로 괜찮다 하지만
그게 사는 건 아니지요.
그럼 어떻게 살면
나의 삶이 되냐를 봅시다.
예를 들어 볼게요.
나이 46세에 가로늦게 자식을 얻어
금이야 옥이야 하며 살다가 출산후
석달이 되기도 전에 또 임신을 해서
애를 낳게 되고 이제 2 아이들을 돌보느라
부부가 자기의 일은 하나도 하지 못하고 삽니다. 아이들 돌보는 일도 벅찹니다
이 부부는 누구의 삶을 사는 것일까요 ?
아이는 부인이 돌보고 남편은 직장에
나가며 살면 된다고요 ? 한번 보세요
그게 가능할지.... 불가능 하더라고요.
이 부부는 오로지 자식부양을 위해서
삽니다. 자기들의 인생이 사라졌습니다.
또 있습니다.
이혼한 다음에 만난 언니가 믿음직스러워셔
모든 걸 맡기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언니가
이상한 겁니다. 자기 카페의 일을 도와
달래서 맡았더니 은근히 그짓읗 권유하며 자기가 못하니까 해달래서 결국은 불법행위로
법의 처벌을 받게 됐답니다. 흔한 일이지요.
그 언니의 정체는 공갈범이었습니다.
언니 때문에 자기의 삶이 어디까지인가 분별하기 힘들었다나요.
상좌스님의 어려움도 여기 속하지요.
큰 스님 아래서 공부하면 큰 스님 될줄 잘못 알고 아랫자리 지키다가 망한 사례가 있습니다.
잘 나가다가 어느 순간에 스스로 아무 것도
안 될 거라는 예감 하나 때문에 쫒겨납니다.
" 큰 스님이 큰 자리를 지키신 까닭은 역시
우리같은 잔챙이 걸러낼려고 그러신 거 아닐까요 ?"
정말 일까요.
자기삶을 의탁하다니 그게 말이나
될지 냉철했어야 합니다.
자신의 삶인데 말입니다.
어느 삶이 더 나을지요 ?
내 삶이 아닌 자식의 탓으로 암 것도 못하고,
믿던 언니가 내 신세를 망치고,
또 큰 스님은 가차없이 밀쳐 버리고,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요.
딱 한가지 때문이에요.
내가 누구이며
누구의 것이냐를 몰라서 그래요.
나는 그 누구의 것이 아니며
우주 만상의 일부로서,
굳이 임자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비로자나불의 것이며,
누구나 태어나서 진정한 인간으로 살다 가려면
부처님의 혼(불령)이 깃든 인간으로 살아야 합니다.
모든 부처는 비로자나불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법선종의 선법사들은 늘 2 단계를 강조하지요.
인간으로 독립되어 진여문(real truth gate: 불법의 진리를 깨닫는 과정))을 열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 곧
생멸문(생전극락을 이루는 화엄과정)을 통과하는 일이며 어찌 살다 가야할지 이 과제가 먼저 쉽게 이뤄져야 하니까요.
비로자나불께서 우리의 근본 불성 (심원불성)을 살려주시므로 , 이분에게 귀의함으로써 곧바로 생멸과 진여의
관문이 한꺼번에 쉽게 활짝 열립니다.
이를 가리켜 "돈오대각"이라고 부르지요.
때로는 성불이니 하는 말도 씁니다.
우리가 지향해온 제마법선도는 법선종의 기본 원리이며 비로자나불을 신앙하는 종교입니다.
이 법선종의 교지를 이해하시면
무지무지 큰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의 삶이 과연 누구의 삶인지
저절로 깨달아지며 사는 게 즐겁고
유쾌해질 테니까 이제 한 번
멋들어지게 살다갈 거라고 혼잣말도
하시면서 정진하시며 기대해 보세요.
잠시 머리를 식혀 봅니다.
" 고뇌하는 삶"에 대해서....
누구나 자기의 삶을 살아가고 싶어 하지요.
하지만, 자기의 범위는 늘 한계가 지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더
나은 삶을 누리려고 애씁니다.
인생에서 대체로 세 번의 영적인 공유결합을 추구합니다.
첫번째의 출생시 선택은 자기혼이 어느 부모의 배를 빌려서 태어 나느냐이고,
두번째의 선택은 누구의 영혼과 함께 평생 사느냐이지요. 자기혼이 함께하는 영혼이 반드시 배우자의 혼으로 단정하지는 맙시다.
상황에 따라서는 부모님일 수도 있고 별도의
신뢰관계를 지닌 사람의 혼일 수도 있지요.
그러나,
마지막 시도는 역시 신령과의 영적인 생활의 동행입니다.
인생이 지긋해지고 저승과의 경계가 가까워질수록 사후의 영혼 안정을 위하여
종교신앙이란 형식으로 신령과의 교류에 에를 씁니다. 물론 자신이 우주의 일부임을 인지한 경우에는 아주 쉽게 죽음을 받아들이며 행복한 사후세계를 영접합니다.
우리는 누구에 매여서 희생하는 삶을 살고 싶어 하지는 않습니다만, 오로지 자신만 위하며 사는 이기적 삶을 긍정적으로 보진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누구에게 매여 살기에는 그 대상자가 누구이든 따뜻한 사랑이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자기희생은 억지로 되는 일이 아니며, 기존 불교에서는 이를 가리켜 탐착이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탐착의 옳고 그름이 존재하진 않으나 우리가 주의경계해야 할 점은 하나 있습니다.
대상자가 사랑을 느끼고 자연스럽개 받아들여 정상적인 대응을 보여주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사랑하는 일은 엄청난 불행의 씨앗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