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강아지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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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바뀌어서 누구나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인간적으로 갖추어야할 기본적인 예의라든가 품위를 무시하고 대단히 상스러운 인간이 판을 치는 희한한 현상이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어서 큰일이다. 나에게 전화로 문의를 해 오는 사람들을 잘 살펴보면 이점이 매우 현저하게 두드러진다. 전화를 걸어서는 다짜고짜,
거기가 어디에요 ? 라든가,
거기가 뭐하는데에요 ? 한다.
상대가 무슨 말을 할지를 예상하기 힘든 것이 전화대화인데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것이다. 여기가 어디이고 무엇을 하는 곳인지 자세히 알고 싶다면 먼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무엇 때문에 전화를 하는지 명료하게 밝히는 것이 예의이다. 이쪽에서 묻지 않는 이상 자기가 누구인가를 밝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래서 누구신가요 ? 하고 물으면, 그때 가서야 자신의 이름을 대거나 아니면 꼭 알아야 합니까 ? 하고 전화를 뚝 끊어 버린다. 그처럼 예의를 지키지 않는 사람이니까, 역시 매사에 어려운 난관이 많을 것으로 예측된다.
이런 사람들은 어디에 가나 누구를 만나거나 자기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그저 상대방이나 이 세상이 자기를 무시한다는 그릇된 사고방식에 매어 있다. 따라서 이런 사람이 많아질수록 세상은 마찰 투성이가 되고 더욱더 불편한 인간관계로 힘들어진다.
과연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자기 혼자만이 상대에게 자유로울 수 있게 만들고 있을까 ? 상대는 늘 자기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고 자기는 상대에게 노출되고 싶지 않다는 매우 비민주적인 사고가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
오래 된 이야기인데 참고가 될까 싶어서 한 가지 생각나는 게 있어 소개해 본다.
2
어느날 나는 강아지 한마리를 동네에서 잘 아는 사람의 부탁으로 키우게 되었다. 그 사람은 이사를 가게된 바람에 강아지를 데려 갈수 없는 처지였다.우선 마당에 묶어 놓고 키우기로 했는데 그 강아지는 야성이 너무 강했던지 아니면 애미에게 떨어지기 싫었던지 며칠 동안 쉬지 않고 끙끙거렸다. 밤잠을 설칠 정도로 끙끙거리는 바람에 어떻게 해줄까 궁리한 끝에 풀어서 기르기로 하였다. 목 띠를 풀어 주자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랐다. 마당구석까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좋아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던 녀석이 한달쯤 지나자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밥도 잘 먹고 가족들에게 고분고분하던 녀석이 점차 사나워지고 담벼락을 향하여 돌진해서 넘어가려는 포즈를 취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마당에 매어 있는 것이 갑갑하다는 눈치였다. 그래도 밖에 나가면 여러모로 위험하니까 마당에서 풀어 놓고 키우는 편이 낫겠다 싶어서 그 녀석의 요구를 들어 주지는 않았다. 동네에 돌아다니다가 아이를 물거나 아니면 잡혀가서 보신탕집에 가면 더 불쌍한 일이 생길 테니까 말이다. 그럭저럭 몇 달이 지났다. 우리 가족은 그녀석이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의지가 사라졌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담을 넘으려고 하는 자세는 여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가족은 이제 내놓고 길러도 집에 찾아오겠지 하고 문을 열어 주었다. 이 일이 화근이 되었다. 처음 몇 달 간은 아침에 나가면 저녁 무렵에 들어오고 자기 집에서 자는 습관을 버리지 않더니 한 6개월 쯤 지나자 외박을 하기 시작했다. 이럭저럭 우리 집에 온지도 일 년이 넘었으니 정(情)도 들었고 나가봤자 우리 집보다 나은 대우는 받지 못하니 돌아 올 것으로 믿었다. 그런 생각이 불찰이었다. 며칠이 지나도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았다.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짐승을 키워본 사람은 누구나 느끼는 점인데, 어떻게 보면 사람보다도 더 정이 가는 것이 짐승이다. 집에 안들어 오니 가족들 모두가 기다렸다. 학교에 갔다 오면 꼬마는 인사하기 무섭게 우리 개가 어디 갔냐고 찾았다. 물론 아무 소식이 없으니 꼬마녀석도 기분이 침울해졌다.
그리고 한 2주일가량이 흐르고 나서 밤 11시경에 그 녀석이 들어 왔다. 갑자기 부엌문 옆에 놓인 밥그릇이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려 가보니 와 있는 것이 아닌가 ! 몸이 수척하여 갈비뼈가 들어나 보이고 털에는 오만가지의 오물을 뭍인 채 여기저기 듬성듬성 빠져있는 모습이 마치 들개나 승냥이 같았다. 얼른 밥을 퍼주고 물도 주고 식구들 모두 깨워서 그 녀석이 돌아 왔다고 알리면서 즐거워했다. 하지만 그 녀석은 잠시 들렸을 뿐이었다. 아마도 다른 곳에 거처를 마련했는지 어쩐지 모르나 역시 그전처럼 밖으로 나가려는 눈치를 보였다. 마음속으로 대단히 섭섭했다.
우리가 너에게 무엇을 잘못 하였기에 너는 자꾸만 집을 나가려고 하는가 ?
좋아하는 쇠고기등심도 생것으로 사다 먹여 보고 별짓을 다 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마치 바람난 처녀 같았다. 우리는 할 수 없이 그 전처럼 그 녀석을 들락날락하게 내버려 두었다. 몇 달쯤 지나자 집에 돌아오는 빈도가 줄어들더니 아주 종적을 감춰 버렸다.
그때서야 나는 그 녀석이 나가던 날 혼자 중얼거렸던 말을 생각해 냈다.
야 이놈아 ! 너는 이제 나가면 끝이야. 다시는 보기 어려울 거야.
내가 이야기한 그대로였다. 그 강아지는 나중에 들은 말에 의하면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한다. 동네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죽어 가지고 그 동네 사람이 처분했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 봐도 참으로 이상한 점이 있다. 왜 그는 집에 있지 못하고 그렇게 밖으로 나가려고 발버둥 쳤을까 ?
3
그 녀석은 선천적으로 역마살을 타고난 것일까 ?
나는 그 녀석이 생각나면 자유를 갈구하는 사람들이 떠오른다. 반대로 엉뚱한 자유를 추구하여 탈출하는 사람들을 보면 역시 그 녀석을 떠올린다.
자유란 도대체 무엇일까 ? 그리고 자유란 어떤 형식으로 설명이 가능한 것일까 ? 제 멋대로 행동하며 예의고 무엇이고 일체 무시한 채 혼자만 편리하게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내가 키우던 그 강아지처럼 비참한 인생을 살아 가는 모습을 보면서 자유란 참으로 자유롭지 못한 일면을 갖고 있는 것이로구나, 하고 일면의 결점을 들여다본다. 목에 매어져 있던 사슬을 풀고 자기의 테두리를 정해 두었던 담장을 넘어 서서, 어디론가 자유롭게 돌아 다녔던 그 녀석이 어째서 그렇게 비참한 죽음을 맞아야 하는 것인지 나도 잘 모르겠다. 생사의 가늠 대를 허물어뜨린 채 살아간다면 이런 문제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일단 생의 테두리에서 보자면 어디까지가 자유인지 분간하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자유롭게 해주기 위하여 결국에는 목숨을 버리도록 방조한 나 역시 옳은 것인지 잘 모르겠다.
에르리히 프롬은 현대인이 자유로부터 도피 한다고 말했지만 어떤 형식과 제도 속에서 자신의 안정을 추구하려는 의미 외에는 진정으로 도피한다는 생각을 하지는 못한다. 어쩌면 현대인의 그와 같은 자살행위는 " 더욱 더 자유로워진 일부 계층의 자유"(아래 참조)를 보장하기 위하여 합리화되는지 모른다.
그런 면에서 살펴보면 현대인은 내가 키우던 그 강아지보다도 못한 삶을 자유랍시고 사는지도 알 수 없다.
나는 오늘도 그처럼 무례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의 전화를 받는다. 그러면서 저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닐 터인데, 왜 저렇게 밖에는 하지 못할까 하는 의문에서 오랫동안 해멘다.
920715 김세환/
2006년 5월 12일 전재
Cf. " 더욱 더 자유로워진 일부 계층의 자유를 "
이 말은 죠지 오웰즈가 쓴 <동물농장>이란 우화소설에서 따온 것인데,
거기서 나폴레옹이라고 하는 혁명주도자가 독재를 하니까,
이에 항거하는 시민대표 돼지가 비난하면서 하는 말이다.
악질 농장주를 몰아내고 자유를 찾은 동물 들에게 나폴레옹이라고 하는 독재 돼지가 군림하자 다른 동물 들이 항거하여 다시 평화를 찾는다는 내용의 소설이 <동물농장>이다.
우리 들은 민주화에 대하여 어쩌면 이런 면의 모순이 드러나고 있음을 감지하면서도 무엇을 어쩌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과거 군부 독재 시대에 민주화 투쟁의 대열에 서서 희생하기에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각종 부정과 비리의 주도자가 되어 썩어 가고 있는 현실을 바라보면서, 이들 역시 나폴레옹 같은 돼지가 아니었을까 ?
하는 의문을 가진다.
2006년 5월 16일 오일육 혁명 45주년 / 제마 법선도 선사 김세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