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안사 노스님의 눈물"
1965년도의 일이다.
“한 달 10만원으로 살아갈 수가 없어요. 스님”
“ 왜 못살아 ? ”
대중들이 들고 일어날 만하다.
(* 대중이란: 절에 기거하며사는 식구란 뜻)
한 달에 겨우 10만원으로 어떻게 절을 이끌고 가나 ?
스님 생각은 이미 6.25전쟁 전의 개념이다.
돈 계산이라는 것은 아무 것도 스님 머릿속에는 없다. 그래서 오늘 이런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며칠 고민하던 스님은 방책을 하나 내놓으셨다. 절 살림이 어려우니 이젠 모두가 살아나려면 맘에 안 들거든 떠나라는 하명이다. 서로 마음에 안 든 채로 살아가기는 어려운 일, 이젠 대중들이 결정을 내려야 할 차례다.
그날 저녁 늦게 하성이가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스님 앞에 선다.
“ 네가 제일 먼저 웬 일이더냐 ?”
하성이라면 일곱 살 먹었을 때 제 어미가 눈길에 버린 것을 안아다가 스님이 옷을 입혀 몸을 녹여 겨우 생명을 건진 놈이다. 때가 때인지라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제대로 못해주고 이날이 되도록 밭일만 실컷 시킨 놈이다. 나이가 제법 먹어 스무 살이 넘었다.
“ 스님 , 저 떠나야겠습니다.”
“ 무슨 소리야 ? 다른 애들은 다 떠나도 넌 안돼 !”
반사적으로 큰 소리가 났다.
눈이 말방울만큼 크다 해서 말방울이라고 놀림감이 되기도 해서 열 살 때나 되어 정식으로 수계도 하기 전에 스님이 손수 법명을 지어 주셨다.
하성(夏聲)은 여름 소리로 늘 많이 거두고 잘 자라도록 기원하는 의미였다.
“ 그러게, 스님이 좀 인심을 얻어가지고 절 살림이 쉽게 하시면 되었잖아요.”
이젠 머리가 좀 컸다고 따지고 든다. 게다가 그 다음이 목을 조이는 말이다.
수계한지도 얼마 되지 않은 녀석이 난데없이 유학을 떠난다고 한다.
“ 저, 그 동안 말씀을 올리지는 못했지만요, 미국 뉴욕에 절을 여신 법해 스님 아시지요. 그 분이 저를 오라고 하시네요.”
참 이상하고도 이상한 일이다. 그전부터 밸이 꼴려서 미운 마음을 지니고 있던 말하자면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자가 바로 법해인데, 하필이면 거기에 간다고 하나. 팔자도 사나운 일이다. 나중에 물어 알아보니 지난겨울 법해가 개안사에 몰래 다녀갔을 때 서로 통교하여 유학을 오라고 미리 약정이 되어 있던 터였다.
“ 왜 ? 니가 거기 가면 공부가 잘 될 것 같으나 ?”
하기야 법해와 스님과의 관계를 잘 모르는 하성으로서는 마침 떠나라고 하는 명이 났으니 이때가 좋은 기회였다.
며칠 밤을 꿍꿍 앓다시피 하면서 하성을 떠나보낼 일을 생각하였다.
... 내 밑에 있어도 별로 나아질 일도 없고, 그래 내일 가라고 하자......
드디어 마음을 먹고 다음날 아침 하성을 앞에 앉혔다. 다른 대중 다섯 명도 자리를 함께 했다.
< 주루루룩>
주지 스님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마음이 아프고 쓰리기만 하다.
“ 그래 떠나도록 해라...”
그런데 하성이란 놈은 천지를 모르고 깨춤을 춘다.
“ 스님, 왜 그렇게 우시나요 ? 제가 떠나면 한결 마음이 가벼우실 텐데요.”
스님 속을 알 리가 없다.
자기가 자식처럼 키운 놈이 가장 미워하는 자의 문하로 간다고 할 때의 심정을 어찌 알 것인가 ? 배신치고는 참 더러운 배신이다. 그렇지만 스님은 일언반구 거기에 대하여 말씀이 없으셨다.
그날 떠난 스님 하성이 바로 지금 종단에서 교무를 맡고 계시는 분이다. 법명을 바꿨으니 아는 사람만이 이 일을 안다.
개안사 노스님은 나와 영혼세계에서 자주 만나 뵈는 사이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도 들려주고 하신다.
“ 스님 뭣 때문에 그렇게 법해한테 감정이 있습니까 ?”
스님은 웃기도 잘한다. 돌아가시고 나서는 참 성격이 소탈해지신 것 같다.
“ 허허허, 법해의 일은 법해의 일이고 내 일은 내 일이지. 묻긴 왜 물어.다 지나간 일이야.”
그러나 찬찬히 전해주시는 공양주 영혼의 말씀은 달랐다.
“ 아무리 도를 깨우친 분이라고 해도 자기자식을 뺏어 가는 데야 별수 있겠어요 ?
다 그만한 사연이 있었어요.”
그만한 사연이란 노스님이 법해에 대하여 치욕적인 모욕을 준일과 연관되어 있었다.
본시 두 분은 해인사에서 방장 스님을 모시고 함께 동문수학을 하셨다. 그런데 날이 가고 달이 가자, 서로 친구사이였던 그들은 제 갈 길로 갈라서게 되었는데, 노스님은 개안사에서 수십 년을 방구들만 차고 있었고, 법해는 아주 빠르게 중앙과 연줄을 대어 높은 스님으로 급수가 올라가고 있었다.
어느 날 자주 들리던 개안사에 찾아온 친구 법해에게 창피를 주고 만다.
“ 야, 이 못된 중놈아 ! 여기가 어디라고 여자들을 끼고 들락거리느냐 ? 부처님한테 미안하지도 않느냐 ? 자네가 제 아무리 줄을 잘 서서 출세를 해도 그렇지 행동거지가 올바르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엇 ! ”
법해는 마침 자기 절 살림에 보탬을 크게 해주어 사찰 중건에 힘이 되어 준 보살 한분을 모시고 개안사를 찾았던 터이다. 그런데 노스님의 눈에는 그 일이 가당찮은 허세이며 계를 깨는 일로 보였던 것이다.
젊은 시절 공부하며 산천을 유람할 때 허리춤에 차고 다니던 방울도 떼 내 버리고 그 대신 여자를 차고 다니면서 의젓한 중견 스님으로 행세하는 꼬락서니가 노스님으로서는 구역질 나는 일이기도 했다.
이에 질세라,
“ 자넨, 그게 병이야. 내가 여자를 차고 다니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 자네가 개안사 주지로 있으니 혹시 내가 도움이 될 수도 있잖은가 ? 저 여 신도는 돈도 많고 복도 많이 짓는 훌륭한 보살일세.”
“ 개 눈깔에는 똥만 보인다더니, 너나 잘 해라. 난 필요 없다.”
노스님의 눈에 신도가 바치는 정성이 색깔 있게 보여 너무나 고깝게 비친 모양이었다. 더구나 여신도가 스님을 자가용에 태우고 절에 나타나는 꼴이 몹시 못마땅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모든 절의 문제를 다루는 감찰원에다가 대꼬챙이 같은 노스님의 고자질이 올라갔다.
“ 모모 스님은 어느 날 몇 시 쯤 어떤 여자와 절에 와서 자랑삼아 떠들고 갔습니다.........운운”
한 동안 불가의 화제가 되어 회자되기도 했다.
그날 이후로 몇 년 간 소식을 끊고 있던 차에 이런 꼴을 당한 것이다. 자기가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자식 같은 제자를 법해가 훌렁 꼬여 가지고 데려간 것이다.
세상일이란 산문(山門: 스님세계)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세상사에 이해하기 어려운 일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최근에 보복 폭행 문제가 되지만 모욕에 대한 복수가 자기 자식을 유인납치(?)하는 일로 이어질 줄이야.
2007년 6월 30일 제마법선사 김세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