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글은 1992년도 7월 법력 강좌를 할 때 작성한 내용입니다.
참 스승은 어째서 화를 내는가 ?
공부하는 사문들이 좋아하는 스승은 아주 민주적인 사람보다는 위엄이 있고 옆에 가면 뭔가 겁이 좀 나는 그런 카리스마적인 타입이라고 한다. 하지만 요즘 그런 스승이 몇이나 있는지 의문이다. 모두들 편하게만 공부하려는 것이 몸에 배어서 싫은 소리하면 중이 절이 싫으면 떠나면 되지 별수 있냐 ? 하고 보따리를 챙겨 사라진다. 그래 가지고는 공부가 되지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인욕(忍辱)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좋은 사문이 되기 어렵다. 봉건시대에는 윗사람을 따르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하면서 법을 배우고 끝끝내 성도하는 스님이 많았지만 지금은 세상이 변해서 민주적이 아니면 그 사람부터 싫어 한다. 스승 이전에 사람을 보고 인간성으로 스승을 선택하니, 선택권이 오히려 제자에게 있다고 하겠다. 제자가 스승을 선택하는 현상은 이미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기에 인기있는 스승에게는 수많은 제자가 따라붙고 인기가 없으면 아무리 법도가 높은 스님이라도 곁에 찬바람만 분다. 그나마 필력이 있는 분은 글이라도 써서 불특정 다수에게 법을 전수한다 치지만 그런 능력이 없는 분은 말년에 시봉들어 줄 상좌 하나 제대로 없어 비참한 최후를 마친다. 그런데 훌륭한 스님의 기준이란 어디에 두어질까 ?
나는 불초한 제자가 법을 공부하다가 답답해지면 혼을 내주는 스승이 훌륭하다고 본다.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이라면 스승이고 제자이고 구분이 있다고 하기 어렵다.
오래전 동국대학에 다닐 때였다. 거기에 장경학 교수란 분이 당시에 민법교수로 계셨다. 수업시간에 무엇인가 질문만 하면 면박을 주는데 주로 이런 식이다. "얼마나 공부를 안했으면 그것도 모르느냐 ? 그런 것은 열심히 공부하면 책에 다 나오는 것이다. 시간낭비니까 질문에 답하지 않겠다."
질문하는 학생으로서는 모욕적 답변이다. 거기다가 한술 더 떠서 공박을 해오시는데,속에서 불이 날 지경으로 화나게 하는 말이다.
" 너희같이 공부 안하는 학생들은 서울대학에는 없다. 너희들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게네들을 따라가지는 못해. 그 따위 시시한 질문을 질문이라고 하냐 ? 정말로 수준에 차이가 나서 강의할 기분도 나지 않는다."
우리 학생들은 장경학 교수님을 무척 싫어했다. 아무리 스승과 제자라고 해도 그렇지 인격적으로 모독을 가하는데는 분한 마음이 생기는 것이 당연하다. 더구나 서울대학의 학생은 우리보다 훨씬 낫다고 구박을 하는 말은 도저히 참기 어려운 말이며, 당시에 서울대학에 정교수로 계셨던 분이니까 공연히 우리한테 스트레스를 해소 하는 것으로 받아 넘겼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학창시절이 저멀리 뒤안길의 아련한 추억으로 사라지고난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그 스승은 정말 대단한 진리를 가리켜 주신것 같다.
<죽었다 깨어나도 따라가지 못한다> 는 진리----사람들은 이 기본적인 진리를 모두 잊어 버리고 학문의 세계와 법의 세계도 평등의 원리가 적용되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다.
물론 조금쯤 잘하는 것은 노력 여하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고 인간이 요구하는 실용성의 면에 충족시키는 수준이라면 죽었다가 깨어나지 않아도 충분히 해낼수 있다. 그렇지만 법의 세계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정말로 죽었다가 깨어날 정도의 인욕과 정진의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절대로 법의 세계를 깨닫지 못한다.
장교수님 같은 분이 이제는 어느 강단에도 없을 것이다. 그 시대만 하여도학생들의 인기 따위는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던 시대이나, 이제는 교수 자신이 학생의 비위를 맞추고 그들과 적당한 관계를 유지하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 그러니 학생들에게 인격적인 모독을 주면서 까지 공부하라고 자극하는 교수님도 거의 없다. 화를 냈다가는 어느 불량학생에게 테러를 당할지도 모르는 겁나는 시대이다.
920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