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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500년의 역사적인 살

2005.08.15 11:50

xemasa 조회 수:5209

3.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적인 살


이씨 왕조가 13세기에 성립되어 약 500년간을 유지해온 가운데 다른 왕조보다 극심한 골육상쟁의 비극을 보여준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다.

어떤 사람은 이성계의 쿠데타에서 연유한 것이라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역사상의 일은 언제나 가능성으로 말할 수 없고 사실에만 입각해야 하므로 따질 것이 못 된다고도 한다.

아무튼 근세의 조선왕조는 왕자의 난에서부터 명성왕후의 시해사건에 이르기까지 피로 물든 역사를 남기고 있다.

그러한 비극적인 사건들이 아무런 연관성 없이 그저 별개의 사건으로 일어난 것일까에는 의문의 여지가 남아 있다.

굵직굵직한 일만 추려보아도 대강 열가지 이상의 궁중사건이 있는데, 임진왜란 이전과 이후를 나누어 보면 성격의 변화가 있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왕권을 다투는 세력의 싸움이 주축을 이루지만 이후에는 그야 말로 내전에서 보이지 않는 영혼들의 힘이 작용하는 느낌을 져버릴 수 없다.

이를테면 장희빈의 왕비등극을 향한 음모 같은 것이 끝끝내 살기로서 작용하여 왕조의 멸망을 초래한 것만 보아도 그렇다.

이성계는 왕조를 세우기는 하였어도 신구세력의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과도기적인 체제를 유지하면서 아들에게 왕권을 물려 준다.

그러나 정종은 본래 자기의 세력을 가지지 못한 무능함 때문에 왕자의 난이 일어나고 본시 아버지와 뜻이 맞아서 쿠데타에서 러닝메이트 역할을 해온 아들 방원이 다른 형제들의 세력을 척결한 이후 왕권을 확립한다.

바로 이 일이 이씨 왕조의 보이지 않는 비극적 인과를 만든다.

형제간의 살육이란 참으로 무서운 일임에도 권력 앞에서는 그러한 인륜 같은 것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왕자의 난은 과도기적인 성격을 띄던 정부를 확고한 신 세력으로 교체시키고 이어서 즉위한 세종은 선조들의 왕권확립에 힘입어 문화정치로 태평성대의 기반을 다진다.

이때 까지가 약 30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그러나 세종은 한글 창제등의 문화적인 업적이란 긍정적인 면이 있는가 하면 반대측면에서는 호색하던 인물로서 많은 자손을 낳았고 결국 후세의 왕권갈등을 일으키는 배경을 만들었다.

이후 세조의 왕위 찬탈을 분석해 보면 흥미로운 점이 발견된다.

나중에 계유정란으로 김종서등 훈구세력이 숙청되는 과정에서 세조는 살을 맞게 된다. 그는 말년에 원인불명의 등창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았으며, 밤마다 나타나는 사육신의 혼령으로 시달렸다.


< 이조 500년의 살 >

년도            사건                       주기

1398 - 1400   왕자의 난                        
              
1453          계유정난                      53년

1494 - 1506   연산군의 폭정, 중종반정       53년

1592 - 1598   임진왜란                      86년

1608 - 1623   광해군의 패륜, 인조반정       25년

1627 - 1640   정묘/ 병자호란                 4년

1689 - 1694   장희빈 득세/사사              54년

1749          사도세자  사망                55년

1850          철종 등극 / 안동 김씨 세도정치  101년

1885.8.20.    명성왕후 시해사건              35년


               *  평균 주기   :      51.8 년  


이후 충절의 상징이 된 사육신의 원혼은 현대의 반정부 투쟁에서도 이따금 원용되었다. 김동길 박사 같은 경우는 '사육신의 꿈'이란 책을 통하여 독재정부에 저항하는 영적인 힘을 선동 조장한 일도 있다.  

어쨌든 세조의 왕위찬탈은 왕자의 난에서 유래한 것이며, 이러한 세력의 재편성과정은 이로부터 53년 뒤의 중종반정으로 이어진다.

그뿐 아니라 세조는 흥선대원군으로 환생하여 조선조의 꺼져가는 마지막 왕권의 불꽃을 되살리려 애쓴다.

이어서 연산군의 횡포스러운 독재는 여자의 한이 왕권에 영향을 미쳐서 무서운 살이 시작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무오사화, 갑자사화등은 연산의 어리석음에서 생긴 숙청작업이었다.

왜냐하면 폭군 연산은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복수에서 그의 본질을 더욱더 왜곡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에 반기를 들고 연산을 몰아낸 중종반정은 이 점을 제대로 풀지 못한 비극적 역사의 시작에 불과했다.

왕자가 가지게 되는 절대적인 고독과 왜곡된 성의식이 모친에 대한 애정 결핍증과 더불어 서릿발 같은 한을 심어 주게 되고 종말에 가서는 왕좌로부터 폐위되는 비극의 역사가, 이후 광해군의 폐위와 사도세자의 비극적 부자 갈등에서도 반복되었음을 보면 누구나 그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조의 역사를 하나의 가족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눈에 보이지 않는 여자의 한과 콤플렉스가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세조 이후의 역사에서 보면 주변세력의 왕권에 대한 도전이 행정관료들 중심의 파당정치로 옮겨져가서 감소한 반면에 중앙집권적 착취구조로 인한 민란으로 바뀌어 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괄의 난이나 홍경래의 난, 임꺽정의 난, 근세의 진주 민란, 그리고 잘 알려진 동학농민전쟁 등은 그점을 반증해 주는 역사이다.

임진왜란과 잇단 정묘, 병자호란은 200년동안 지속된 이조의 성장기를 마무리 짓고 17세기 이후의 쇠퇴기에 속하는 무능하고 타락한 정부가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예를들면 이조에 나타난 청백리 200인 중에서 180명 정도가 임란 이전이고 이후에는 그 명예로운 상을 받을 만한 인재가 별로 나타나지 않았음을 보아도 이점을 알 수 있다.

왕조가 쇠퇴함에 따라 왕조가 개시된 이래 약 200년간의 세월이 지나 저절로 하나의 왕가가 생명력이 위축될 즈음에 발생한 외침은 어찌 보면 이 왕조로서는 생명유지를 위한 기적과 같은 사건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은 여러가지 의미를 가지는 역사적 환란이었다.

변란이 있고나서부터 민심이 예전 같지 못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사람들의 말씨도 격해져서 '곷(花)'이라 발음하던 것이 '꽃'이 되고 '말삼(言)'이라고 하던 것이 '말씀'으로 변하는 등 인간의 혹독한 심상이 발음의 경음화로 드러나 상스럽고 살기가 강해졌음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전쟁이 가져온 생산력의 약화로 인하여 왕조가 소요할 예산이 부족하여 경복궁을 떠난 창경궁 종사가 무려 250년이나 계속되는 등 나라 살림이 말이 아니었다.

경복궁은 남성을 강화시키는 자리인 반면에 창경궁은 여자의 세력을 강화 시키는 신비한 힘이 있는 곳이라서 더욱더 왕조에 구중궁궐의 힘이 작용하게 민드는 추세를 보였다.

장희빈의 암투사건은 이점을 극명하게 드러낸 사건이었다. 장희빈과 그의 아우 장희재의 한맺힌 죽음은 결국 왕조에 외척의 입김이 작용하는 첫번째 계기가 되었다.

왕조의 몰락이 세도정치로 인하여 촉진되었음은 역사학자들도 인정하는 바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씨왕조는 외세와 척신의 발호에 의하여 쇠망하였으나 보이지 않는 한 맺힌 여자의 영혼들이 적잖게 뒷켠에 서 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