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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마법문] 우리가 "공"을 만날 때

2017.06.17 11:30

xemasa 조회 수:3552

[제마법문] 우리가 일상에서 "공"을 만날 때

 

<요약>

 

우리는 고통스러운 일을 겪을 때 해탈공을 이룰 수 있으며

반대로 대단히 즐거운 일을 겪을 때에는 열반공을 경험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경험한 두가지의 공을

아무 의미없이 잊어버리고 지나감으로서  평생 동안 살면서

아무런 영혼의 진화를 이루지 못하고 맙니다. 

비극적인 삶의 과정에서는 내가 오욕과 비탄을 이겨냄과 동시에

모든 사람들이 그런 일을 겪지 않고 살수는 없는 일임을

깨우쳐야 하며, 이와 반대로 엄청난 희열을 느끼는

승리와 성공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나에게 주어진

하나의 작은 행복요소일 뿐이며, 결코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일이 아님을 또한 깨달아야 합니다.

 

결국 자기의 주변에만 머무르는 이기성을 탈피하고,

어찌 하면 다른이들과 함께 멋지고 아름다운 생을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좀 더 큰 눈을 지니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 일이 바로 열반공이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슬픈 일 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여러번 공을 만나는 시기가 있는데도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고 그냥 지나갑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곧장 선도를 통해서 공을 만나려고 오신 분들 삼매경 강좌를 들으려 오신 분들, 마음에 낀 때를 벗기려 오신 분들 참 잘 오셨습니다.

 

지금부터 언제 우리가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공을 만나게 되며 ....그런 기회를 왜 놓쳤고,

 

어떤 공을 만나는 시기를 겪으며 그 공을 느끼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 볼까 합니다. 공을 만나고 나서도 그 게 공인줄 모르고 살아가는 중생심에서 벗어나서, 이제부터는 좀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여 정말 공부하는 자세를 갖추게 해드릴 게요.

 

어느날 우리는 아래와 같은 일을 겪습니다.

 

1. 혈족의 죽음

2. 사업의 실패

3. 승진의 탈락

4. 배우자(애인)의 배신

5. 억울한 누명

6. 사선에서 헤매는 경험

 

이런 일을 겪어보지 못하셨다고요 ? 그럴 리가 없지요. 누구나 다 일생에 이런 일들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슬픔과 분노를 일으키는 일들이 우리에게는 바로 " 해탈공"입니다.

이와는 전혀 반대 방향으로,

 

 

1. 새로운 생명의 탄생

2. 사업의 성공

3. 예상 밖의 발탁

4. 결혼의 성취

5. 엄청난 포상

6. 죽었다가 살아난 경험

 

이런 좋은 일은 일생에 아직 단 한 번도 없었다고요 ?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일 이런 좋은 일들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보다 더 좋은 일을 겪을 수도 있으니까, 별로 느낌이 없었을 겁니다.

이러한 좋은 경험에서 얻어지는 공을 가리켜 "열반공"이라고 합니다.

두 가지를 합치면 "해탈 열반공"인가 봅니다.

 

왜냐하면 나쁜 일들에서 쉽게 벗어나는 것이 해탈이며,

좋은 일에서 그다지 오만해지거나 깝치지 않는 것이 또한 열반입니다.

우리는 해탈과 열반을 수도 없이 겪으며 살면서도, "그저 그런 일들이었어..."

하며, 그런 일들이 우리에게 공을 만나게 하는 일이었음을 못 느끼고

살지요. 여러분들은 이런 해탈과 열반의 경험들을 그저 희노애락의

일부로만 느꼈기 때문에 죽음에 이르러서도 무엇이 진정한 해탈이며 열반인지

모를 것이며, 따라서 해탈하는 일과 열반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우리의 인생에 주어진 법계의 일들인지를 그저 일상사로 치부하며,

공을 만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자 , 한 번 돌이켜 보고 놓쳐버린 자신의 해탈과 열반공은 어땠는지를

되돌아보세요.

 

과연 그런 일들이 축생이나 식물에게 일어났다면 즐겁거나 슬프거나 노여운 일에 대하여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동식물들은 그러한 심리적 환경변화가 있을때에

아마도 생태적인 적응을 위하여 진화를 위한 영소자(靈小子)의 변이가

발생하도록 자신의 영혼을 작동시켰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심성으로 이런 일들을 다스리지만

어리석은 심성은 너무나 이기적인 까닭에, 단 한 번도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깨달음의 기회였는지를 모르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저 생노병사가 인생의 네 가지 고통이라고요 ?

아닙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일상 속엔 진정한 생노병사가 따로 있습니다.

진정으로 느끼고 공감하고 감동하고 그 속에서 진실한 가치를 찾으며

생에 대한 고마움을 깨우치는 일이야 말로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못 느끼고 사는 일일뿐, 고통도 즐거움도 그저 그런 것이라고 여기며

그런 사람이라면 평생,,, "공"을 만나지 못합니다.

고통과 환희라고 하는 전혀 상반된 두 가지의 심경변화는 이런 점에서 어찌보면 인생에서의 깨달음을 터득하게 만드는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그렇지 않았습니까 ?

카필라성에 살면서 출가하시기 이전에 생노병사라고 하는 인간의 모든 고통 과정을 살펴보면서 인간은 어째서 이러한 고통을 겪으며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가슴속에

품었기 때문에,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정든 카필라성을 떠난 것이겠습니다.

 

공을 만난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 아셨지요 ?

 

"왜 무엇 때문에 우리가 이런 지옥과 극락이 일정 비율로 섞여 만들어진 이 세상을

살아야 하고, 잘 살아가려면 어떤 지혜를 갖추어야 하는가"를 깨우치는 것이 매우 중요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처음 공을 만난다고 하는 것은 슬프고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해서 바로

해탈을 위한 마음의 깨우침을 얻는다는 뜻이며, 그 이후에 즐거움에서도 오만하지 않고

또한 새롭게 얻은 즐거운 삶 또한 똑 같이 허무하다는 경지를 느낀다면 그 사람은 당연히 해탈 이후의 열반과정에 이미 들어간 사람이라고 보는 관점입니다.

 

그래서 슬프거나 고통스럽거나 분노심에 가득한 상태에서

만나는 공은 우리에게 그저 그런 거야 하는 체념이 아닌 진정한 해탈을 가져다주며,

즐거운 마음을 갖춘 다음에도 이에 만족하지 않고 그런 감각적이고 겉껍질에 불과한 쾌락이란 모두가 허망함을 깨우치게 만드는 공의 차원이 바로 열반공입니다.

공부하시던 스님들 중에 이 관문을 뚫지 못하고 저 세상에 가신 분들도 많습니다.

작은 배에 지나지 않는 해탈공에 멈춰버린 나머지, 무엇인 진정한 열반인지를

알지 못한 채, 소승이라 할 성문 독각이 되고 마니 참으로 안타까웠던 것입니다.

큰 깨달음과 열반 , 해탈에 머물지 않고 곧바로 다가가는 바로 그 속 시원한 깨달음....

다시 말해서 대승적 차원에서의 열반이 뭔지를 그 누구도 분리해서 공부하지 않았던 결과입니다.

고통에서 헤어나는 해탈공을 찾는 것이 중요하지만 거기에 잘못 머물러 버리면 ,

성불이 어렵습니다.

 

성불은 열반공(涅槃空), 구경공(究竟空)을 얻는 일입니다.

 

 

해탈공을 만난 그 다음에 그 편안한 마음자리에 다시금 찾아드는 "이게 아닌데 ?" 하는

열반공의 갑갑한 슬픔을 잘 새겨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아직 그러실 단계가 아니시겠지만,

이 두 번째의 알음알이(空識)란 참으로 뚫고 지나가기 어려운 "공"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앞으로 다가올 여러분들의 과제이며, 마지막 장애이기도 합니다.

 

원효스님이 말씀하십니다.

" 우리가 평상(平常)에 살면서 얻지 못한 것을 닦는다고 따로 구할 수가 있겠는가 ?"

 


서산스님은 이 말씀에 이어 다음의 소중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 우리나라가 수없는 전쟁과 내란을 거쳤음에도 조선불교가 무너지지 않은 것은 국가적 해탈공을 궁극적으로는 열반공으로 전환시켰기 때문이다. 임란 직후 피폐한 상황에서 희생자를 추모하며 모두가 아미타여래를 믿는 마음은 극락왕생과 살아남은 자들의 지상의 불국토를 만들고자 한 중생들의 염원이 컸기 때문에 생긴 것이고, 그 어떤 구원의 미륵보살도 이룰 수 없었던 열반공을 오늘에 이르도록 우리 스스로 찾게 만들었다."


숭산 행원스님께서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 공이란 비어있는 듯이 차있고, 차있는 듯이 찬 것도 아니며, 어딘가 무너지고 스러져야 비로소 그제서사 처음부터 비어 있었음을 깨우치는 일에서 얻어지는 것이니 .... 어찌 보면 상처가 많은 우리나랏 사람들이 슬픔과 좌절을 수없이 겪는 가운데서 공을 터득하고 해탈하며, 필경에는 나만의 삶이 전부가 아님을 깨치고 더 넓은 범위를 내다 보며 자기를 던질 줄 아는 마음 자세로 바뀌어,  구경공을 얻을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할 거야."


동산스님이 한 마디 더 목청에 힘을 주시며 거들어 주십니다.
 
" 우리들이 잘 살게 되고 아주 쪼끔씩 사는데 여유가 생겼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마음이 아주 빈약한 거지수준이지요.
당신 말 그대로야. 원효스님 말씀대로 평상이 곧 깨우치는 길인데, 어려움, 슬픔, 고통스러움을 겪으면 그 때 뿐이고 자기가 발 딛고 새로운 공의 경지를 열려고 하질 않아요. 심지어 절간에 공부하려 와서들, 편하게 깨우치려고 해요. 그러니 뭐가 얻어지겠소.  어려움을 겪으면서 하나 하나 소중하게 얻은 지혜를 다른이들에게 전하려는 그 자세가 중요한데 당초에 누구에게 베풀생각도 없고, 제 공부 제가 하고 가르침이 빈약하니, 참으로 훌륭한 말이요.  해탈공을 얻거든 즐겁게 열반공을 나가기 위하여 좀더 기꺼이 베풀 줄도 아는 인간이 되라는 그런 말이 참 듣기 좋소. 실천해야지요. 꼭 모두가  그렇게....아끼지 말고. 마치 벼락부자가 된 사람이 더 지독한 행색을 보이는 것 같은 오늘날의 선사님들은 좀 더 깨우쳐야 하오."



 

 

 

2017 년 6 월 16 일 금강삼매 법강/ 원효스님, 서산 스님, 동산스님, 숭산스님,성준스님

 

 

 

[ 참고사항]

 

"해탈공과 열반공을 얻으려면..."

 

인생에서 비극적인 일이나 너무 기쁜 일을 겪에 되면

누구나 정신이 멍해지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

정신이 나간 듯한 해리상태가 됩니다. 그 해리상태가 바로

공에 해당되는 차원으로 변화하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참선을 10 년한 사람이나, 비극적인 일을 10 년 동안 겪은 사람이나

아마도 그 머리에 형성된 삼매상태는 거의 비슷할 겁니다.

비극적인 일에 대한 우리의 영혼이 마음자세를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런 비극을 겪으면서, 증오심이나 키우면서

오히려 개별적인 영적 차원이 더 낮아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은 똑같은 비극을  겪어도 마음 자세 하나로

큰 차이가 난다는 점입니다.  비극에 빠져  위태로운 상태가 되어 버린

영혼을 잘 이끌어 줄  영지도자들이 많다면, 오히려 그 영혼을 구하여

진정한 해탈공을 찾게 만들어 줄 수 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여기에 해당되는 대표적 사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부모님들의 죽음을 딛고 일어섰던 지도자가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우리나라의 지도자가 되었다가 , 필경에는 다시 영어의 몸이 되고만

비극이야 말로, 해탈공과 열반공의 조화로운 깨달음이 왜 필요한가를

웅변해 주고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 트인 분이 곁에서 잘 인도해 주었더라면

부모님의 죽음을 통하여 진정한 해탈공을 통한 리더십과 깨우침을 얻어서

국가지도자가 되었을 것이며, 당선된 이후에도 작금의 사태가 터지지 않도록

스스로 국민을 위한 정치를 베풀어 가지고 열반해탈까지  도달함으로써, 

진정 훌륭한 국가지도자로 역사에 기억되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점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도자란  지도자적인 인격 그 이상의 무엇인가를 갖춰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공여법(空如法)"입니다. "무생법인"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 , 확연하게 다른 차원적인 차이가 없다면,

지도자가 되어선 안 된다고 봅니다. 자기가 희생되더라도 나라와 국민은

살려야 한다는 정신은 거기서 나옵니다.

 

다시 말해서,

공의 중도논리에서 생사열반상공화(生死涅槃 相共和)

라고 하는 말은 곧 삶을 떠나서는 생사를 논하기 어려우므로

죽음조차도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서 이를 냉철하게 바라보자는 식으로,

생사와 열반은 서로 잘 어울리는 것이라는 논리가 여기서 닿게 하려면

우리가 살면서 인생의 희비에만 자꾸 매달리지 말고, 그 본질이 되는 空을

철저하게 관조하는 눈을 지니자는 사회적 논리이며 개별적 의미를 강조하고

싶습니다.

 

 

 장준하 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