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마풍수] "서태지-아이유...소격동"
종로구 소격동은 조선왕조의 도교 의례청인 소격서가 있던 자리이며
그 자리에 조선조에 공인된 도교의 사당이 서 있었다.
역사의 흐름은 이제 가수가 노래하여 당대의 전설을 신화로 만들고 있다.
소격(昭格)이라는 말은 원래 태양신의 힘이라는 뜻이며
조선총독부는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을 바로 이 소격동을 바라보는 자리로 옮겼다.
지금은 본래 자리로 돌아갔지만 학창시절에 문루조차 없는 가여운 모습의 광화문을 6 년동안
보았던 나로서는 소격동이 아무래도 그리 좋은 느낌은 아니다.
왜정시절의 육군병원 자리가 해방 이후 그대로 수도육군병원이라는 이름으로 유지 되다가
10.26 사태가 나던 날 박 대통령의 시신이 옮겨져 사후 검안을 받은 자리가 바로 그 병원이었다.
삼청동에서 흘러내리는 시냇물을 건너는 다리가 놓여진 바로 그 옆의 병원은 붉은 벽돌 건물이었고 담쟁이가 늘어진 건물의 모습은 뭔가 살벌하고 음침한 느낌이었다.
서산
소격서 [昭格署]조선 관청 | 브리태니커
조선시대 국가적인 도교의 제사를 주관하던 관청.
도교의 제천행사로 삼청성진(三淸星辰 : 上淸·太淸·玉淸으로 신선들이 살고 있다는 곳)에게 지내는 초제(醮祭)를 담당했다. 이와 함께 도학을 가르치기도 했는데 도학생도의 정원은 10여 명이었다. 관원으로 제조 1명, 별제 2명, 종5품 영(令) 1명, 종9품 참봉 2명을 두었으며, 영과 별제는 모두 문관으로 임명했다. 유교를 기본이념으로 하는 조선은 개국하면서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도교의 여러 궁관(宮觀)과 전당(殿堂)을 없애고 소격전과 대청전(大淸殿)만 남겼다. 1396년(태조 5)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에 소격전과 삼청전을 새로 설치했다. 1466년(세조 12) 관제개정 때 이름을 소격서로 바꾸었고 이후 〈경국대전〉에 수록되었다. 그런데 유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그 덕목에 의한 실천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소격서 혁파논의가 대두했다. 최초의 혁파논의는 1479년(성종 15)에 제기되었다. 그러나 제천의식과 기우제 등은 국가적인 큰일이고 유래가 오래되었으므로 혁파할 수는 없다 하여 비용을 줄이거나 청결하게 제사하는 선에서 논의가 마무리되었다. 1496년(연산군 2)에 다시 혁파논의가 발생했는데, 소격서가 비용만 많이 들고 국가에 도움은 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이에 소격서를 안양군(安陽君) 항(行)의 집으로 옮겨 공식적으로는 혁파된 셈이 되었다. 중종반정으로 중종이 즉위하자 소격서는 다시 복원되었다. 그러나 이후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 인사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혁파논의가 강하게 대두했다. 이들은 소격서가 노자를 숭상하는 이단이며, 제후의 나라인 조선에서 직접 하늘에 제사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것을 이유로 내세웠다. 결국 1518년(중종 13) 유신들과 성균관 유생들의 집요한 요청으로 소격서를 혁파했으나 1522년 대왕대비의 병환을 구실로 다시 회복시켰다. 이와 같은 소격서의 혁파와 복설은 유교주의 정치의 정착과정에서 전통적인 관습·제도와의 갈등에서 빚어진 것이었다. 소격서는 임진왜란 이후에 완전히 폐지되었다.
[연예기자24시]"역시 서태지"..'소격동' 큰 반향, 그러나 출처 스타투데이 | 입력 2014.10.02 09:39 | 수정 2014.10.02 10:07
기사 내용
[매일경제 스타투데이 조우영 기자] 서태지 작사·작곡, 가창 아이유. 단순히 이름값만으로 기대감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던 이들의 조합이 역시나 가요 차트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서태지와 아이유의 콜라보레이션 신곡 '소격동'이 2일 0시 공개되자마자 국내 주요 음악사이트 실시간 차트 정상을 싹쓸이 했다. 이날 오전 9시 현재 멜론 엠넷 지니 등 10개 음악사이트 1위는 모두 '소격동'이다.
약 5년 만에 새 음악을 들고 나온 서태지다. 그간 그를 둘러싼 논란이 많았다. 자신의 목소리보다 '국민여동생' 카드를 먼저 꺼내든 그의 행보를 두고 기대만큼 우려도 컸다. 호기심에서라도 그의 음악을 들어봐야 했다. 음원 차트 1위는 당연히 예상됐다.
서태지와 아이유의 파급력은 막강했다. 뒤늦게 알려진 그의 사생활 탓에 배신감을 느껴 등을 돌렸던 일부 사람들조차 "역시"라는 감탄사를 토해내야 했다.
오롯이 음악만 놓고 봤을 때 그의 프로듀싱 역량을 평가절하 하기 어렵다. 1980년대 유행했던 신스팝 장르의 '소격동'은 서태지를 통해 한층 세련된 사운드로 거듭났다. 몽환적이면서도 멜로디 라인이 정확히 귀에 꽂히는 요즘 트렌드와 부합한다.
뮤직비디오에도 그리움과 따뜻함이 공존하는 서태지 특유의 감성이 담겼다. 마치 낮은 담장과 가로등을 돌아 동네 골목 구석구석을 둘러보는 듯한 시각적 심상이 잘 드러났다는 평이다.
무엇보다 '소격동'이라는 시대적 공간이 던지는 의미가 음악을 듣는 이의 가슴을 더욱 세게 두드린다. 서태지 답다. 노래는 이야기와 메시지를 담았을 때 큰 울림을 갖고 있는 법이다. 서태지는 이를 결코 간과하지 않았다.
서태지 측이 공식적으로 언급하진 않았으나 '소격동'은 암울했던 한국 현대사의 그늘이다. 무소불위 권력의 상징인 국군기무사령부가 한때 자리잡았던 곳이다. 전두환 정권 당시 운동권 학생 6명이 의문사한 곳이기도 하다.
서태지는 이 '소격동'에서 '어느 날 갑자기 그 많던 냇물이 말라갔죠. 내 어린 마음도 그 시냇물처럼 그렇게 말랐겠죠/ 소소한 하루가 넉넉했던 날 그러던 어느 날 세상이 뒤집혔죠/ 다들 꼭 잡아요 잠깐 사이에 사라지죠'라는 서정의 힘을 보여줬다.
1995년 반 사회적 감정을 담았다는 이유로 방송불가 판정됐던 그의 곡 '시대유감' 정신이 부드럽게 녹아들었다는 해석이 나올 만하다. 시대의 부조리를 노래하고, 억압에 항거했던 '문화 대통령'으로서 그의 면모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서태지가 넘어야 할 벽은 여전히 남아 있다. 독창성이다. 혹자는 그를 "'선구자'가 아닌 '음악 밀수자'일 뿐"이라고 깎아내린다. 그가 가요사에 남긴 음악적 발자취는 인정하나, 한국에서 유행하지 않은 장르의 외국 음악을 잘 가공해 널리 알렸을 뿐이라는 주장이다.
이조차 대단한 능력이지만 그에게 늘 시비가 붙는 '표절 논란'은 이 때문이다. '천재성'을 거론할 때 빠지지 않는 가수이기에, 유독 딱딱한 잣대를 그에게 들이대는 대중이다. 그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이번에도 '소격동'은 스코틀랜드 출신 혼성 그룹 처치스(Chvrches)의 곡 '더 마더스 위 쉐어(The Mother We Share)'와 분위기가 비슷하다는 주장이 일각에서 나오고 있다.
물론 '소격동'은 표절이 아니다. 분위기가 비슷하다는 의견이 살짝 있을 뿐이다. 서태지가 바보가 아닌 이상, 국내에도 꽤 마니아 팬이 있는 그들의 곡을 차용했을 리 없다.
전문가들은 "장르적 특성상 일부 리듬과 악기 사운드가 비슷해 오해를 받을 가능성은 있다"고 말했다. 또한 처치스의 보컬 로렌 메이버리(Lauren Mayberry)를 보면 아이유가 쉽게 떠오르는 점도 이러한 의혹을 부추기는 데 한 몫 작용했으리라 여겨진다.
아직 뚜껑은 다 열리지 않았다. 한꺼풀 벗었을 뿐이다. 일단 서태지가 선택한 아이유의 '소격동'은 음악 팬들을 충분히 만족하게 했다. 아이유가 아닌, 서태지가 부를 '소격동'(10일 공개 예정)을 기다리는 어린 팬들도 크게 늘었을 테다. 향수에 젖어든 기성 팬의 귀환은 말할 것도 없다. 오는 20일 발매되는 그의 정규 9집 '콰이어트 나이트(Quiet night)'에 대한 관심은 최고조에 달했다.
다만 서태지 덕분에 그룹 처치스의 국내 팬도 크게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처치스는 오는 11월 30일 서울 광장동에 있는 악스코리아에서 내한공연을 연다. 10월 18일 서울 잠실 올림픽주경기장에서 2만 5000명 규모의 컴백 공연을 여는 서태지에 비하면 국내에서 그들의 존재감은 미미했던 터다. 아마도 내한한 그들이 기자간담회를 한다면 "서태지를 아느냐"는 다소 유치한 질문을 받을 것 같다.
[한경에세이] 기무사 터
- 2009-05-19 18:13:02수정
- 2009-05-20 09:35:00
- 김선정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sunjung1998@yahoo.co.kr>
국군
기무사는 시간의 흔적을 담고 있는 역사적인 장소다. 이 곳에 대한 기록은 고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무사가 위치한 서울 종로구 소격동은
고려시대 도교 수련과 제사를 지내던 소격서에서 유래했다.
조선시대에는 사간원,규장각,종친부가 있었던 곳이고,일제 강점기에
수도육군병원이 건립됐다.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부속병원으로 지어진 본관 건물은 박길룡의 설계로 1929년 완성된 건축물이다.
박길룡은 지금은 사라진 종로 화신백화점을 설계한 근대 건축가다. 해방 이후 병원 시설로 쓰이다 한국전쟁 뒤 육군이 접수,1971년
기무사의 전신인 국군보안사령부가 들어섰다. 이 곳은 신군부가 이끈 12 · 12사태의 진원지가 되는 등 현대사의 현장이었다.
기무사는 보통 사람의 접근이 어려운 군인들만의 공간이었다. 살벌했던 이 곳이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 분관으로 개관된다. 역사의
소용돌이 중심에 자리 잡은 공간이 새로운 문화 공간으로 바뀌는 것이다. 하지만 이 공간이 어떤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고,어떤 내용을 담아야
하는지는 깊이 있게 생각해 봐야 한다.
첫째,근대화의 자취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지금의 서울에서 기무사 건물이 갖는 의미는
남다르다. 근대 건축가의 작품적 가치뿐만 아니라 한국 근대 건축의 유산이기도 해서다. 이 때문에 새로 만들어질 공간과 기존 공간이 조화롭게
연출돼야 한다.
둘째,기무사는 경복궁과 국립민속박물관의 맞은편에 위치해 있다. 주위에는 한국 미술계의 중요한 화랑과 미술관들이
길을 따라 자리 잡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분관이 개관하면 자연스레 문화의 거리가 조성돼 서울 시민뿐만 아니라 외국 관광객들이 찾는 장소로서의
특성을 반영해야 한다. 인사동과 북촌을 연결,한국적인 모습과 국제적인 요소가 만나는 곳이 되어야 한다.
셋째,국립현대미술관은 서울
중심에서 다소 떨어진 과천에 있다. 접근성의 문제 등 여러 여건상 현대 미술의 담론을 만들거나 세계적인 미술관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데 소홀했다.
이 때문에 기무사에 마련되는 분관은 현대 미술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생산하는 곳이 돼야 한다. 전통을 품으면서도 새로운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프로그램 및 전통과 현대를 통합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가는 곳이 됐으면 좋겠다.
기무사는 지금 비어 있다. 빈 공간에서 시간이
쌓여 만들어진 역사의 겹을 알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미술관이 만들어지기 전에 예술적 작업을 통해 그 안에 담긴 우리의 역사를 읽고 이야기를
들려 주는 일은 가능하리라 생각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한 이 곳이 담고 있는 기억과 역사를 예술 작품을 통해 보여 줄 수도 있다. 구전되는
이야기나 기록되지 않은 역사를 담는 작업 또한 가능하다. 잊혀진 기억이나 보이지 않는 역사적 흔적을 드러내는 일이 결국 예술가들이 할 수 있는
일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