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혼이 몸에 깃들어 일으키는 두 가지의 지각현상이 생각과 마음입니다.
어떤 생각과 마음이 생겨 나서 그로 인하여 스스로 생노병사를 결정합니다.
그러니까 이 두 가지의 변화무쌍한 의식 작용은 곧 우리 인간의 모든 것을 좌우합니다.
아래의 글을 통하여 하나 하나 자세히 설명드릴 터이니 한 번 공부해 보세요.....
마음을 놓아두고 생각을 되찾으니, 부처도 하나의 신령이고요...
放心尋思而佛是亦一神靈
마음을 되찾고 생각을 버리니 부처도 하나의 인간이군요.
尋心放思而佛是亦一人間
마음과 생각을 모두 버리고나니 부처가 바로 나이며,
放倂心思而佛示稱揚我
마음과 생각을 모두 되찾으니 내가 또 다시 부처로군요....
尋倂心思而示我稱揚佛
<상세한 해석>
마음과 생각은 서로 혼재하기 때문에 우리 정신과 심리 상태 속에서 항상 섞여 가지고 작동되고 있지만, 일단 이 두가지 현상을 둘로 나누어 빼고 집어 넣고 하는 상황을 한 번 가정해서 하나 하나 살펴 보기로 합니다.
자, 지금부터 우리가 부처님 앞에 단정하게 앉아서 아래와 같은 경지로 들어갑니다.
(1) 마음을 놓아두고 생각을 되찾으니, 부처도 하나의 신령이고요...
마음을 놓아둔다고 하는 것은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을 가리키며 그 상태는 곧 감정적인 변화를 모두 멈춘다는 뜻이지요,
그리고 생각을 되찾는다는 것은 아주 이지적으로 머리를 써서 오로지 이성적으로만 판단한다는 뜻이 됩니다.
어쩌면 아주 딱딱하고 윤기가 없는 생각으로 철학적인 정신적 무장을 갖추는 일을 가리킵니다.
그런 상태로 부처를 보게 되면 부처는 하나의 신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 신의 영혼을 만나게 되어 많은 가르침을 받게 됩니다.
이런 분들은 대체로 절에서 경 공부를 가르치고 평생을 보내는 이판승을 하십니다. 팔만사천 법문 중에 모르는 부분이 없는 분이됩니다.
(2) 마음을 되찾고 생각을 버리니 부처도 하나의 인간이군요.
부처란 본래 자비와 지혜의 상징적인 존재입니다. 그리고 더할 나위 없는 절대적인 능력을 소유하고 있는 분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 자신이 어떤 마음을 없앴다가 다시 찾으면 그 때부터 부처님이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어찌 보면 부처님은 인간도 아니고 신도 아닌 존재로서 계시는 분인데도, 어찌 나의 감정에 좋아지기도 하고 나빠지기도 하고 그러면서 변화무쌍한 존재로 자꾸만 변합니다. 그 까닭은 내가 부처님 앞에서 마음이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유동적인 자세가 된다는 뜻입니다.
관세음보살이나 부처님 앞에 가면 눈물이 저절로 흐른다는 분들은 아마도 마음을 다시 찾으신 분일 겁니다. 그것은 마음만 되찾아서 그렇습니다. 부처님 앞에 왜 내가 울어야 해 ? 하고 생각을 함께 되찾으면 눈물이 나오지 않게 됩니다. 이 게 뭐야 ? 내 앞에 앉아 계시는 분은 그저 불상이쟎아 ? 하면서 금방 눈물도 마릅니다. 부처를 사람으로 받아들이는 나의 마음이, 곧 부처를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마치 어머니나 아버님을 만나듯이 그렇게 됩니다. 모든 종교는 바로 여기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도 하나님이라는 신령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런 경지의 분들은 높고 낮은 종교지도자가 됩니다.
(3) 마음과 생각을 모두 버리고 나니 부처가 바로 나이며,
사람이 머리를 가진 존재로서 어찌 마음과 생각을 버리겠습니까만, 삼매(正入定:samadhi)라고 하는 정신적인 경지에 이르면 우리는 누구나 자기의사에 따르는 아무 생각도 감정도 없는 상태가 됩니다. 그저 멍한 것은 아님데도 분명히 자기가 다른 상태로 변하여 있는 것을 느낍니다. 이제까지 두뇌가 지배하던 복잡한 인식체계, 다시 말해서, 예를 들어 보자면, 눈으로 보고 관찰하고,인지히고, 사고하여, 판단하며, 스스로 명령하여, 일정한 행동으로 옮기는 사변 체계가 무너지는 단계에서 마음과 생각은 훌쩍 나를 떠납니다.
그리고 앞에 앉아 계신 부처가 바로 내가 됩니다. 어쩌면 부처가 나한테 오셨을까 의심될 정도입니다. 붕 떠있는 듯한 느낌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기가 완전히 없어진 것도 아닌데도, 그 어떤 마음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고 따라서 변화가 없는 상태로 달라집니다. 마치 뭉게구름을 타고 한 없는 공간 속을 날아가는 듯합니다. 바로 그 때 마치 앞에 앉아 계신 부처님이 곧 나인 것 같은 느낌이 들게 됩니다.
그러나 이 상태에 머무는 사람은 대오(큰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고 평생 수행자로 살다가 갑니다. 많은 수행자를 만나 봐서 느끼는 점이지만, 자칫하면 부처나 신령에게 홀려서 자아도취로 일생을 사는 분이 될 가능성도 많습니다.
(4) 마음과 생각을 모두 되찾으니 내가 또 다시 부처로군요....
여기서부터가 제법 오래 걸립니다. 어떤 사람은 수십년간 냅다파도 내다 버린 마음과 생각을 되찾지 못합니다. 입정은 잘 하는데, 내다버린 마음과 생각을 다시 추스리지 못하고 붕붕 떠다닙니다. 선문답이니 뭐니 하면서 머리가 희끗희끗해져서 꾀만 여우같이 늘어가지고 허튼 소리는 잘 하지만, "아~ 저 분이 바로 깨달은 사람이구나" 하고 상대의 가슴에 와 닿을 만큼의 무슨 징표를 내보여 주지 못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동안 공부한 것들을 아상이라고 하는 틀에 가두고 참담하게도 자기가 믿고 의지하는 불성에 매달아 놓아버렸기 때문입니다. 살불살조라고 하는 말이 거져 생긴 말이 아니며, 이런 경지의 가엾은 사람들을 위하여 만들어 놓은 말입니다. 오죽하면 살기가 감도는 말,살불살조(부처님과 조사님을 죽여라)라고 강조했는지 실감하셔야 합니다.
자, 여기서 잠시 우리는 대승이 무엇을 말하는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기로 합니다. " 00 야,너 왜 사니 ?" 하고 물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물론 자기입니다. 자기를 돌아보는 그 시점에 남이 자기에게 와 있어야 바로 대승입니다. 그 것도 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거나 , 모든 중생, 모든 우주의 생명체, 때로는 이보다 더 나아가서 생명이 없는 우주의 실상적 존재들이 모두 자기에게 들어와 박힌 , 그런 경지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작은 아상에 매달린 불성을 가지고 발저리게 엎드려 살지 말고, 대승적인 견지에서 좀더 높은 차원으로 올라타야 합니다. 절간의 부처님은 점안식을 해서 부처를 만들어 드리지만, 깨달은 사람을 부처로 만드는 일은 그 누구도 대신 할 수가 없으며, 자기를 내다 버린 본인이 적극성을 띄고 대승의 행보를 내딛어야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미리 알려 드립니다. 그래서 오늘도 저는 여기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더러 스님들이 그런 대승적 행동을 가리켜 만행이라고 부릅니다. 만행이 없는 공부는 책끈이 떨어진 책입니다.
부디 성불하소서.......
" 30 년 전엔 네가 바로 나이더니, 이제와 다시 보니 내가 ㅡ 바로 너로구나 ...."
2011년 5월 28일 제마법선사 서산 김세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