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에 대한 몇 가지 생각을 정리해 봅니다."
예언에는 객관적인 예언과
주관적인 예언
그리고 신령계시적인 예언과
자기망상적인 예언
암시적인 예언과
서사적인 예언으로 크게 나눌 수가 있습니다.
00 유록이나 0 감록 같은 비술서에 속하는 예언 집은 주관적인 예언의 범주에 자기망상적인 예언과 매우 암시적인 예언이 중복된 상태로 나열되어 있습니다.
표현은 대체로 시적인 문구로 적혀 있으며, 그 점에서는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과 유사합니다.
<우리나라의 도참설은 거의가 허구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언을 도참설이라고 하여 정치적 변화에 가장 중점을 두고 개벽이라든가 하는 관점에서 크나큰 변화를 추구하는 마음의 표시로 여깁니다.
낙관적인 미래에 대한 예언보다는 선택적이고 구원설화에 가까운 예언은 모두가 위작입니다.
비록 내용이 잘 짜였다고 하더라도 문장 내용으로 살펴볼 때 작위적인 면이 보이는 예언은 혹세무민하는 자세의 몽상적인 유언비어에 불과합니다. " 난리가 났을 때 어느 지역으로 피하면 살고 다른 지역으로 가면 죽는다."라든가, " 이런 믿음을 가지면 하늘이 살려주고 다른 믿음을 가지면 모두 휴거 대상이 아니다." 그런 식입니다.
그런데도 무엇 때문에 그런 예언이 더 인기를 끌고 더욱더 믿음이 가는 이유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입니다.
현실에 대한 혐오증 때문입니다. 뭔가 세상이 더 나아지는 것이 없을까 하는 긍정적 심리보다는 혹시 확 뒤집어져서 나에게 우리 가족에게 더 큰 혜택이 돌아오는 일은 없을까 하는 기대심리가 앞서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는 삶에 지치고 압박 받는 이들이 아직도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19 세기 개화기에서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모든 도참설들은 따라서 예언적인 가치를 인정하기 어렵다고 봐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가치한 것은 아니며, 어려움에 가득한 민중들의 절망 해소와 그에 따른 막연한 소망을 풀어주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고 선의적으로 해석해 봅니다. 그러니까 예언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종교적인 설교에 가까운 표현들이라고 받아 들여야 할 줄로 압니다.
<현재 진행 중인 예언의 문제점>
어떤 이의 예언은 아주 구체적으로 마치 일상생활에 연관된 것들을 모두 알려주려는 듯이 친절하고 자상하게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심지어 세제나 물가에 이르기까지 마치 국가경영지표처럼 예언하는 내용도 눈에 띕니다. 그러가 하면 어떤이는 단 한가지만을 말하고 그것으로 금년도의 예언에 대합니다. 또 어떤 이는 시를 작성하여 애매하게 내용을 전하려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과연 예언이 필요한 시대인가에 눈을 돌려 보셔야 할 줄로 압니다. 그러한 예로서 아무도 원치 않는 예언을 한다면 그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뭔가 알려 주고 귀띔을 해주어 대비를 하라는 의미로 알려주는 것은 무방하지만 더러 위협적인 예언도 가끔 눈에 들어옵니다. 백두산이 폭발한다든가, 큰 지진이 일어날 것이라든가 하는 예언이 여기에 속합니다. 차라리 올 여름에 냉해가 이어질 것이므로 가능하다면 냉해에 약한 작물은 피하는 것이 좋다든가 하는 정도의 예언은 실리적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최근의 예언에 드러나는 문제점은 어떤 의도를 담고 있는 듯한 경향성이 많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면 정치성향으로서 노골적으로 차기 대선에서 누구가 유리하다는 식으로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차라리 상업적인 예언으로 보아야 합니다. 다시말해서 장삿속의 일종의 커머셜 메시지라고 하겠습니다.
< 어떤 예언이라야 하는가 ?>
예언은 마치 꽃술과 같아서 안에 담고 있는 꽃이 어떤 모양새임을 스스로 눈치채게 해줘야 합니다.
직설적인 예언은 의미가 없습니다. 담고 있는 뜻이 많아도 제 나름대로 해석하여 각자 예언으로서의 가치를 만들 수 있는
메타 로직스(다중해석이 가능한 논리: 다중논법)의 묘미를 안고 있어야 예언입니다.
시중에 나도는 예언들은 거의 모두가 창조적인 상상력이 부족하여 직설화되어 있어서 유치하기 그지없고 예언자로서의 자질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차라리 장기 기상예보나 경기 예상표 또는 증권사 정보지를 보는 편이 낫습니다. 정치에 관한 것도 어느 당이 어느 정치인이 어떻고 하는 예언이니 참으로 한심합니다.
언젠가 1995년 경 유명 지관과 무당이 김일성 주석의 사망을 예언했다고 해서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온 사건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러한 예언도 가능한 일이기는 합니다. 그리고 모든 국민의 관심사였으므로 어느 정도 예언에 대한 신비로움을 일깨워준 데 대해서는 시비의 대상이 되질 않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였습니다. 이후로 그 예언을 한 사람의 말이 맞아 떨어진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저 역시 정치적인 예언을 했던 일이 있으며 그런 예언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지도 깊이 깨닫고 다시는 그러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어린 마음에 예언을 내어 놓으면 그 일이 광장한 파장을 몰고 올 것이라 예상하는 욕심이 앞섰고 그것은 일종의 자기현시욕이 불러오는 결과였으므로 지금 생각해 보아도 실 웃음이 나오는 유치한 행동이었습니다.
언젠가 미륵당 보살님 말씀 그대로 지켜나가고 있습니다.
" 예언은 자기의 희망사항이 담기면 안 될 것이야, 자기희망을 담으려면 그 뜻을 기도로 표현해야지 왜 예언을 해서 많은 이들에게 그릇된 인식을 심어줘야 하나 말이야. 항상 냉정한 시야로 꼭 해야 한다는 말이 나올 때라면 저절로 훌륭한 예언이 되겠지, 안 그런가 ?"
요즘 법사라든가 선사님이라든가 어디 절의 스님들이 심심찮게 정초가 되니까 올해의 예언을 내놓고 그러시지만 실상 누구나 잘 살펴보시면 아는 일이나 실현가능성이 있는 예언은 거의 눈에 띄지도 않습니다. 현실을 연장한 정도의 이야기거나 엉뚱한 공포성 발언이 대다수이거든요.
< 예언의 3 대 요소>
예언이란 최소한 신비한 힘이 동원되어 이뤄지는 미래사항에 대한 경고라든가 예지적 통보라든가 그런 면이 있어야 예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사람이 그냐 미래예지를 하는 견지에서 뭐라고 미리 말하는 것은 예언의 범주에서 제외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기막히게 들어맞았을 때에 비로소 그 예언은 예언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고 많은 이들에게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반드시 어떤 신비한 차원의 신령적인 힘이 작용할 것이라는 점에 대하여 누구나 인정할만한 일입니다.
예언에는 세 가지의 기본 요소가 성립요건이 됩니다.
예언자가 존재해야 하며, 그 예언이 어떤 필요성으로부터 나와야 하며 , 세 번째로는 예언을 하는 예언주체가 신령이어야 합니다.
(1) 예언자의 존재 : 예언하는 사람이 직업적 예언자인가, 점술가인가, 종교지도자인가, 단순히 신들린 사람인가 하는 점에 대하여 예리하게 살펴 보아야 합니다.
(2) 예언의 필요성 : 아무 의미도 없는 일에 대한 예언은 무가치합니다. 예를 들면 경기가 좋아지고 나빠지고 하는 일등은 경제예측에 관한 일로서 예언의 주제가 될 수 없습니다.
(3) 예언주체가 되는 신적 존재 : 어떤 사람이 예언을 하든 그 내용이 신령적인 분위기를 갖추고 있지 않다면 세상일에 대한 인간적인 예상이나 예측이지 예언이 아닙니다. 따라서 신을 모시지 않는 사람의 예언은 예언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예언은 미래의 중요사항에 대하여 대중을 상대로 알림으로서 미래에 대한 대비를 하도록 일러주는 일종의 공공성을 띄는 작업이므로 개인적인 예언은 점사(占事)라고 하지 예언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지난해 예언에 숨겨진 사실>
모든 예언이 다 그렇지만 지나 놓고 보면 아 그 말이 바로 이런 일과 연관된 비밀 글이었나 하는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작년 한 해 동안 가장 이슈가 된 사건은 무엇보다도 천안함 침몰과 연평도 포격사태와 연관된 북한의 침공과 광우병발생으로 인한 살처분이라는 테마입니다.
“삼킬 탄”이라는 한 글자로 요약된 국운 중에서 두 가지 사항이 너무 놀랍게도 정확하게 예시되어 있음을 이제야 깨닫게 됩니다.
지나놓고 살펴보면 신기할 정도로 국운 중에서 두 가지가 삼켜지는 것에 대하여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천안함은 戮灣廻征으로 바다가 삼켜버렸고, 광우병 소와 돼지들은 땅에 묻혔으므로 塵泥牛警이라고 표기되어 땅이 삼킨 셈입니다. 그리고 내용을 잘 살펴보시면 그 순서가 그대로 적혀 있습니다. 그 광우병 살처분 시기도 일치하여 축월(양력 11월)에 가장 큰 피해를 낳습니다. 그리고 得守城耶(득수성야)라고 하여 소가 나라를 지키는 모습이 나옵니다만,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소들이 죽어서 전쟁발발로 인한 인명 피해를 대신 막아준 것은 아닌지 소름이 끼칠 정도입니다.
2010년 국운
“呑(탄)”
仇來上峰 戮灣廻征
外城始沮 自衝動步
夕而盛市 幽主努討
奇奇妙時 車兵勝號
塵泥牛警得守城耶
避天述句 攪事晩策
輔棟遊戱 何數克亂
오랑캐가 봉우리에 올라
참담한 정벌을 시작하니
바깥 성주가 서성대며
지키려 애쓰네
저녁나절에 장이 섰는가 ?
죽은 성주가 토벌에 나서니
묘한 시각에 군사가 닥치누나
진흙 범벅이 된 소가 몸부림치며
성을 지킨다 하네
하늘의 이치를 피해갈 수가 있는가 !
비책이 나돌지만
모두 늦은 수일뿐...
방아틀의 쩌귀 나무들이 놀고 있으니
난을 어찌 이기고 해악을 물리칠 것인가 ?
...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