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가치가 땅에 떨어진 세상은 비극의 연속입니다.”
추석을 맞이하여 윤리가치(a Valuation of Social Moral)의 붕괴를 생각해 봅니다.
부인 부정으로 인한 가정 파탄, 노인 학대, 직장 하극상, 사제 윤리의 붕괴가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요 ?
우리나라만의 일은 아닙니다만 우리사회가 더욱 심각한 수준을 보여 주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위자료 청구소송이라는 모 방송프로에 이런 이야기가 나오더군요.
바람난 여자와 이혼하는데 오히려 돈을 더 줘야 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10 년간 그녀가 받아야 할 가사노동의 대가가 7 천만 원이고 남편에게 줘야 할 위자료 3천만 원을 빼면 오히려 4 천만 원을 남편에게서 받아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야 합의이혼이 정식으로 성립된다고 합니다. 남자가 바람피우면 그가 피땀을 흘려 이뤄놓은 노동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노동가치 같은 것은 전혀 인정받지 못합니다. 이상한 일이지요 ?
세상이 이렇게 변했습니다.
이는 윤리가치의 붕괴를 의미하는 무서운 일입니다.
물론 상식선을 벗어난 일입니다.
비록 부인이 바람을 피웠다고 해도 노동가치는 인정해야 한다는 긍정적인 측면의 해석도 있지만, 통상적인 윤리개념에서는 돈 한 푼 못 받고 쫓겨나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었던 일이 엊그제의 일입니다. 그러나 작금에 이르러 그런 여성중심의 판결을 여성의 인권을 존중하는 일이라서 환영한다고 들 말합니다.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가정을 유지해야 한다는 윤리가치는 그다지 인정받지 못하고 노동가치에 밀리는 세상입니다. 어떡해서 남편의 윤리가치 요구가 아내의 노동가치 요구 수준보다 낮은 것일까요 ?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한국의 현실입니다. 역설적인 말이지만 이렇게 부정으로 인한 이혼 후의 경제문제를 보장해주다가 보니 어쩌면 안심하고 바람피우는 일이 더욱 더 성행하는지도 모릅니다.
또 한 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스님 한분이 20년간 따르던 상좌에게 개인사찰을 물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상좌는 곧바로 개인소유였던 사찰을 자기가 주지로 임명 받는 조건으로 종단에 헌납하기로 마음먹고 서류를 위조하여 주지스님이 쫓겨나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보복을 한 셈이지요.
“ 나를 20 년간 부려 먹고 땡전 한 푼 안 주고 쫓아내려고 한다.”는 게 바로 그 이유였습니다.
최근의 사고방식으로서는 20년 동안 일한 노동대가를 주지 않고 그냥 부려 먹었으니 당연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제지간의 윤리는 사라지고 만 셈이지요. 노동조건의 불평등만이 사회적으로 통하는 개념이 된 세상입니다. 이 사건은 곧 종교계의 부조리를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역시 이 문제도 잘 살펴보면 윤리가치가 노동가치에 못 미치는 세상인심의 변화를 말해 줍니다.
“ 내가 섭섭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늙은 스님을 오히려 쫓아내다니....” 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실정입니다.
더구나 그 상좌가 주지 스님 몰래 여자관계가 복잡한 상황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그 일이 그냥 상좌의 뜻대로 진행되고 말았습니다.
스님은 상좌가 물려받으면 반드시 여자 손에 넘어갈 일을 걱정했다고 합니다. 노스님이 대접 받아야 한다는 윤리가치는 사라진지가 오래입니다.
스님과 상좌 사이에 형성되었던 윤리의 가치는 수 십 년간 무료봉사했다는 억울함에 가득 찬 노동가치를 이기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또한 좋은 스님이 안 나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추석을 맞아서 깊이 가족들 끼리 모여서 토론해 보아야 할 심각한 문제이기에 여기 올려 봅니다.
윤리가치가 노동가치에 우선되는 세상이기를 빕니다.
감사합니다.
2007년 9월 24일 제마 선사 김 세환 합장
추신:
굳이 돈으로 따진다면 윤리가치는 자식이 예뻐서 그냥 부모가 사랑의 표시로 주는 돈이며, 자식이 마당 청소를 해서 용돈 버는 것은 노동가치입니다.
그런데 요즘 얘들은 사랑의 표시를 의무화 시키고 있고 자식이니까 부모가 주는 일이 당연하다고 주장하지요. 유산도 마찬가지고요. 고마움 따위 전혀 없다던데요.
그렇다면 부모는 자식에게 평생 봉사해야 할 노예인가요 아니면 노동자일 뿐인가요 ?
참, 큰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