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마법선도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제마수련의 기본
  • 제마수련의 기본
  • 귀신이란
  • 제마수련법의 기본 2가지!
제마수련의 기본 게시판

“신비주의에 대하여”

2011.03.02 13:31

xemasa 조회 수:3042

“신비주의에 대하여”


우리 모두가 모르고 살아가는 것은 언제까지나 정말 모르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 배우면 신비주의가 사라지지요. 그렇지만 알고 싶어 미치는 사람은 자칫하다가 신비주의에 빠지지요. 알 때 까지는 신비하니까요.  그러다가 조금이라도 알게 되면 그때부터는 신비하지가 않지요. 그러나 진짜 신비한 것(예:우주의 구조, 텔레파시 능력의 메카니즘)은 제아무리 노력해도 머리로는 알 수가 없어요. 그러다가 갑자기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구나 하고 깨달았을 때 비로소 다 알게 되지요. 이를 가리켜서 지적 감지능력의 한계라고 말합니다. 머리로 지능으로 파악하려고 애쓰는 박사급의 인재들 중에 깨달은 사람이 안 나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참 다행이지요. 우리는 멍청한 그런 천재들은 아니거든요


아는 게 많은 사람은 깨닫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깨달은 사람은 모르는 게 없어요. 서구식 교육에 물든 우리들은 그냥 두뇌공학에 따르는 입력, 활용 시스템에 갇혀서 움직이다가 보니까, ㅡ 머리가 뭔가 가득차서 때로는 미치기도 하고 집착증에 걸리기도 하고 그러지요. "있는 그대로 받아 들여"라는 말은 내 머리가 생각하는 그대로 감정이 움직이는 대로 순수하게 받아들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고약하고 심술궂게  섣불리 공작을 벌이지 말고 재주 피우지 말고 자기의 수준에서 솔직하게 만사 만물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는 훈련부터 다시 시작해야지요.


자기치료 (셀프 힐링)의 첫 번째 단계는 뭐니 뭐니 해도 바로 그 일이 이뤄져야 합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며 살고 있지 ? 하는 의문에 대하여 답이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비정상적인 생각들에서 벗어납니다. 먼저 그 일부터 해야 합니다. 의문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짐승과 다를 바가 없지요. 내가 지금 무슨 생각으로 이 글을 읽고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져 보시면 그 자리에서 바로 머리가 시원해집니다. 읽는 자 따로, 생각하는 자 따로, 그렇게 분업화 시키지 마시고, "내"가 읽어 보세요. 그러면 머리가 아주 명랑해지고 자신감이 생겨납니다.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든가 하는 그런 골치 아픈 어리석음에서 금방 벗어날 거예요.


신비주의에 빠진 사람들은 대체로 영락없이 <에드홀릭: ad holic/결부망상>에 걸린 사람들입니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고 말하면 까마귀하고 배가 서로 친척이라도 되는 것처럼 억지로 가져다 붙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뭔가 신기한 면을 찾아 항상 헤매면서 거기서 인생의 보람을 찾거든요. 예언, 차력술, 최면기술, 퇴마법, 이상한 주술 방식 등등 그런데 매달립니다. 신비주의에 빠진 사람들이 사기를 치는 이유도 거기서 나옵니다. 제 스스로 속이거든요... 그러니 남 속이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겠지요. 그래서 큰 문제가 됩니다.

[신비주의로 인한 해악의 사례]

● 위대한 힘에 대한 과신에서 오는 노력과 정성의 부족
● 결부망상으로 인한 신경 과민 증상 /불요한 금기(taboo)
● 미신적인 행위에 대한 지나친 집착과 기대
● 절대자에 대한 집착에서 오는 종교망상 또는 광신증



2011년  3월 2일  제마법선사  서산 / 청강 / 장선생 / 김 세환






신비주의 (종교)  [神秘主義, mysticism] ......브리태니카 자료


일반적으로 감춰진 진리나 지혜를 영적으로 추구하는 것.
신(神) 또는 신성한 존재(초월적인 영역)와 합일하는 것에 목적을 둔다. 모든 주요종교는 신비주의 형태를 지니고 있으며, 미개한 문화의 주술, 입신(入神) 의식, 세속적인 체험에서도 그 형태를 유추할 수 있다. 종종 신비주의를 신학과 비교하여 우위에 두고 신비주의가 신학보다 더 진정하거나 더 주관적이며 열정적이라고 말하지만, 이 두 형태의 종교사상은 사실상 병존해왔고, 한 개인이 2가지를 모두 지니는 경우도 흔하다. 그렇다고 해서 신비주의 체험을 신학적인 의미로 환원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말은 아니다. 그와는 정반대로 신비주의 신학자들은 신학적인 분석으로는, 신비스러운 정화(淨化)·계시·합일이라는 독특한 체험을 파악할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다고 분명히 주장해왔다.

힌두교는 다른 어느 종교보다 신비주의적으로 해석되는 경향이 있다. 힌두교 의식 가운데 최고의 이상으로 꼽히는 고행자, 즉 '목사'(mokṣa : '해방'이라는 뜻)는 힌두교를 배우는 서구인들뿐만 아니라 힌두교 스승들에게도 커다란 주목을 받아왔다. 요가파(Yoga)는 전통적인 힌두교 안에서 선택된 소수가 신비스러운 통찰의 수준에 이를 수 있도록 하는 특별한 신비주의적 기법에서 유래했다. 요가의 기법들은 개인의 영혼이 삼라만상에 흡수된다는 힌두교의 전통적인 교리들과 결합되었다. 힌두교 신비주의의 어떤 형태들은 신자 개인을 힌두교 만신전(萬神殿)의 특정한 신(예를 들면 크리슈나 또는 시바)과 연결시켜주는 등 보다 개인적인 성향을 띠는 데 반해, 몇몇 형태들은 궁극적 실재의 은총과 권능에 의지하고 굴복하는 수동적인 신앙을 강조한다.

여러 불교 종파의 공통점은 명상과 관조를 열반(涅槃 Nirvāṇa)에 이르기 위한 방법으로 강조하는 데 있지만, 그 목표에 대해서는 각기 해석이 다르다. 불교 신비주의에 관한 논의에서 특별한 관심을 끄는 것은 금강승(金剛乘 Vajrayāna)(→ 금강승)과 선종(禪宗 Zen)(→ 선종)이다. 티베트의 금강승 또는 탄트라 불교의 구도자들은 신비적인 무아지경(無我之境)에 이르기 위해서 요가 훈련과 함께 절대주의적 철학과 고도의 상징언어(象徵言語)를 사용한다. 한편 일본의 선종은 실천을 강조하고 사실적인 용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불교의 신비주의 지류와 정반대되는 지류로 해석되는 경우가 많지만, 이 종파도 일상적인 방법을 통해서 얻는 부분적인 지식 대신 반야(般若 prajñā : '지혜'라는 뜻)를 얻기 위해 수련하므로 신비주의 사상과 유사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슬람교의 수피(Ṣūfῑ) 신비주의는 선불교와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대답에서 만족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실제적인 종교적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서 등장했으며, 기존의 이슬람교에 있던 신비주의 체험을 중시하는 일부 추세를 받아들였다. 수피 신비주의는 그리스도교를 포함한 다른 여러 신비주의와 마찬가지로 신랑과 신부 사이의 도취와 사랑에 관한 은유를 사용하여 스스로를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것은 알라의 절대주권과 초월성을 강조하는 〈코란〉의 가르침과 조화를 이루기가 쉽지 않은 언어였다. 그러나 수피 신비주의는 〈코란〉이 가르치는 '전적 타자'인 신이 너무 엄격하고 멀다고 느끼는 사람들을 신의 실재에 더욱 가까이 접근할 수 있게 해주었다.

유대교 신비주의는 성서의 예언자들이 본 환상과 성서시대 이후 유대교의 묵시적인 상상에 근거하고 있다. 유대교 신비주의의 가장 독특하고 심오한 주제는 카발라(Kabbala)인데, 이것은 13세기말경에 등장한 〈세페르 하 조하르 Sefer ha-zohar〉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카발라). 이 책은 하느님의 권능과 내면적 삶을 묘사했으며, 참된 신자는 원칙들과 계명들을 지킴으로써 인간이 천진한 순수성에서 타락함에 따라 무너지고 만 데베쿠트(devequt :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라는 뜻)를 회복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 이후의 유대교 신비주의는 이러한 조하르의 지혜를 토대로 꾸준히 발전되어갔다. 특히 하시디즘형태는 일반인들의 신앙과 의식에 폭넓은 영향을 끼쳤다(→ 하시디즘). 마르틴 부버의 사상에서 하시디즘은 그리스도교 사상뿐만 아니라 세속적 사상의 형태로 나온다.

그리스도교의 신비주의적인 양상들은 동방 신비주의를 특징짓는 체계화된 비의(秘儀) 전승들과는 대조적으로 회상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사물의 본질이 본래 악함을 강조한 초기 그리스도교 시대의 이단인 영지주의(靈知主義)는 조로아스터교와 그외 동방 종교들의 정서를 지니고 있었던 유대교 신비주의의 잔재였던 것 같다. 바울로와 요한의 종파에서 자연스럽게 자주 등장하는 '그리스도-신비주의'가 그 뿌리를 이룬다. 3~4세기의 사막 교부들은 신비스러운 계시를 받기 위해 의식(意識)을 갖고 준비하며 실천하는 은둔 전통을 세워놓았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신플라톤주의의 주제들과 표상(表象)에서 이끌어낸 '존재의 신성한 빛'은 후대 신비주의자들의 문헌에서 강하게 등장했고, 마이스터 에크하르트(1329 죽음)에게서 절정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에크하르트는 이상세계의 실재를 강조했으며, 만물을 하느님의 존재 안에서 영원히 존속하는 요소들로 보았다. 14세기에는 신비주의가 교회뿐만 아니라 수많은 이단 종파 안에서도 번성했는데, 이러한 현상은 그뒤 여러 시대의 특징을 이루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개신교 신비주의자들은 신적인 빛 또는 불꽃이 보편적인 원칙이라는 점을 명백하게 인정하는데, 이것은 가톨릭의 가르침에 함축되어 있다.

중세 이래의 서양철학사는 우주적 신비주의(cosmic mysticism)라는 말로 가장 잘 특징지을 수 있는 사상 형태를 포함하고 있다. 베네딕트 드 스피노자는 이 사상형태를 철학의 체계로써 가장 명석하게 설명했고,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문학을 통해 이를 설명했다. 이 견해에 따르면 불합리하고 위협적인 것처럼 보이는 우주 안에서 인간은 자신을 우주의 구조와 목적에 일치시킴으로써, 그리고 존경과 헌신의 태도를 수양함으로써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오늘날에는 고대의 서사시에서부터 윌리엄 블레이크, 스테판 말라르메, 그밖의 시인들의 시(詩)에 이르기까지 문학작품에 잘 나타나 있는 신비주의적 환상과 문학적 영감의 관계가 미학(美學)의 주요쟁점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