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을 세우다”
꽤 오래 전의 일입니다.
다른 스님 가문의 선제자 한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법화경 책을 곧추세우고 묻습니다.
“ 제가 왜 이 책을 세웠는지 답을 내어 해주십시오. 저는 선사님께서 말씀하실 답을 이미 생각해 두었으니 어떤 답을 주시더라도 그에 반론을 세워 드릴 각오가 서있습니다. 마음대로 답을 해 주십시오.”
가만히 살펴보니 불립문자(不立文字 : 선가에서 가끔 인용하는 사자성어로서 언어적 깨우침이나 선도의 통달은 무의미하다는 뜻임))를 해선으로 보여줄 모양입니다.
책을 눕히지 않고 세로로 세워 놓고 대드는 걸 보니 자기로서는 최선을 대하여 공부를 좀 한 모양입니다. 게다가 답을 이미 생각해 두었고 어떤 답을 주더라도 거기에 맞춰 반론을 제기할 준비도 되어 있다고 하니 참으로 기개가 가상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 제자는 선을 잘못 알아도 참 너무나 잘 못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 그래 ? 그럼 잠깐 가까이 다가오시게나.”
제자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서 앉자마자, 그 책을 세로로 세운 그대로 잡아채서는 머리통을 한 방 갈겼습니다.
“ 딱”
“ 아이쿠나”
불이 번쩍 납니다.
“ 어떤가 ? 불립문자의 맛이 제대로 틀어 박혔을 텐데.”
“ 어째서 그런가요 ?”
“ 그대가 아는 모든 문자가 머리통과 부딪쳐 딱 소리 하나로 끝이 났으니 말일세.”
그 제자는 무슨 말을 해서 머리로 이해가 가도록 말로 풀어 줄 줄 기대하였는가 봅니다.
그렇게 해서 말로 풀 수 없는 경지를 어찌 헤아리시나요 하는 식으로 미주알 고주알 대들고 싶었던가 봅니다.
세상이 어지러우면 자신이 얼마나 모자란지를 깨우치지 못하고, 자신이 아직 모자란 만큼을 확실하게 보여주며 대들듯이 공부하는 어린 사람이 늘기 마련입니다.
그 제자는 이후 큰 스님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큰 절 법회에서 서로 얼굴을 마주 한 일이 있었지만 부끄러운 나머지 슬금슬금 뒷 태만 보여주고 사라지곤 했지요. 참 순진한 사람이었습니다.
2010년 12월 17일 제마선사 서산 합장
* 이글은 서산대사님의 말씀을 영계대화로 직접 듣고 이를 토대로 재작성한 내용이며 다른 기록이나 자료에는 없는 것이므로 오해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