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마법문] “선문답이란 곧 영혼의 대화입니다”
우리가 무슨 말인지 모르나 자기들끼리만 통하는 대화를 한다거나, 동문서답으로 엉뚱한 말을 주고 받을 때 선문답을 한다고 푸념을 부립니다. 본래는 선문답이란 선사가 제자들에게 어느 정도 참선공부가 되었는지를 살피기 위하여 던지는 말과 그 해답입니다. 선문(禪問/공안:선공부에 스승이 내주는 질문)을 주었는데 이에 걸맞지 않은 답이 나오면 “너는 아직 멀었다”하시지만, 그렇지 않고 어느 정도 넉넉한 답이 나오면 “너는 이제 가서 차나 한 잔 하거라”하고 뒷방으로 밀칩니다.
이렇게 서로만 알 수 있는 선문답을 여기 한 가지 사례를 들어 보여드리지요.
“여기 있는 이 물건이 무엇인가 ?” 하고 물컵을 들어서 보여줍니다.
그런데 “컵입니다” 하고 답을 하면 선문답이 아니게 됩니다.
거기에는 공부한 정도에 따라 답이 여러 갈래로 나뉘며 상황에 따라서 답이 제각각 달라집니다.
어느 제자 분은 그냥 컵을 발로 차버립니다. 그러면 선사는 “ 그렇습니다. 제대로 답을 하였습니다”하십니다. 그냥 보면 정말 미친 사람들이지요.
논리를 완전히 벗어났으며, 일상적인 사람이 이해하기 어려운 대화법이니까 때때로 이런 공부를 왜 하는지 모르겠다고 불평이 대단합니다. 더구나 고등교육을 받고 석박사 학위를 지닌 사람들은 “ 이런 공부가 다~ 있나 ?” 싶어서 처음에는 당황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머리로 해석하니까요.
그러나 정말 머리좋은 이들에게는 서운하시겠지만 선문답은 <영혼의 대화>입니다.
어떤 선가들은 컵을 발로 차는 것이 일체를 무너뜨리는 해답이라고 부추기지만 그 속을 어찌 알까요 ? 질문을 했는데 컵을 발로 차고 나가면 정확한 해답이라고 답하는 것은 그날 거기서 그 선사만 낼 수 있는 답일 뿐입니다. 만일 그런 선문답에 답이 정해져 있다면, 선문강의록을 다 독파하면 사례들이 쭈욱 나열되어 있으므로 그 내용을 모두 기억하면 될 것이지만 그것은 터무니 없는 짓입니다. 선사에게 연방 죽비로 얻어터지기나 하시겠지요. 그러다가 쫓겨나고요....
선문답이 영혼의 대화임을 깨닫게 되면 해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불가에서 소위 가끔 마음을 가지고 두 가지로 해석하지만, 본질적인 측면에서의 마음이라고 한다면 역시 그 내면은 <영혼>이 핵심이 아닐까요 ?
그러니까 서슴지 않고 선사가 제자에게 묻습니다.
“ 너는 어디로 가느냐 ?”
“저는 가는 데가 어딘지를 묻지 않습니다.”
“ 왜 그러느냐 ?”
“ 저는 아직 그 어디에도 오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가는 데라니요?”
.... 라든가 답하면서 알듯 말 듯한 말을 되뇝니다.
모든 인간은 영혼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마음속으로 살려 굴리고 있고,
또 하나는 외부세계에 투영하여 객체와 함께 대화하면서 살아갑니다.
안과 밖이라고 정해놓은 벽을 무너뜨리는 순간부터 선문답이 가능한 영혼의 대화가 이뤄집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해 보세요.
2010년 10월 6일 제마 법선사 서산 김 세환 합장
<추신>
불교에서 자주 마음이라고 표현하지만 대체로 그 정체를 살펴보면 영혼입니다. 참고하세요.
염화가섭의 미소의 일화에 나오는 이심전심이라는 말도 잘 보면 그때의 마음이 곧 靈的 요소임을 알게 해 줍니다. 영혼이 아니라면 마음이 어찌 전달이 되나요 ?
선문답이란 말하자면 무당의 공수와 하나도 다를 바 없습니다. 알고 나면 쉽지만 알기까지는 전혀 모르는 그런 대화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