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空)이란 무엇인가 ?
공은 전통적으로 빈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저 빈 것이 아니라 아주 철저하게 빈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있다가 사라지는 존재로서의 유무에 사로 잡혀 버린 사람은 공이라는 개념이 모호하기만 하다.
옛날 어느 제자 하나가 이 문제에 대하여 자기의 이해력에 한계를 느끼자 ,
“ 공이 빈 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하며 분노심에 가까운 의문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리 시간이 지나가도 풀지 못하고 꿍꿍 앓고 있기에, 이 의문에 대한 답을 분명하게 일러 주었다.
“ 공은 말이다, 본래부터 없는 것을 가리킨다. 우주 공간의 아무 것도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서, 태초에 무엇인가 생기기 이전의 상태를 말하지. 다시 말해서 절대적인 무(無)인데, 이 개념이 잘 잡히지 않으면 이런 사실을 한 번 생각해보면 금 새 이해가 될 거다.”
그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세차게 때렸다.
딱 하고 큰 소리가 들린다.
그러자 곧바로 제자의 입에서 비명이 쏟아져 나온다.
“ 아파요. 왜 때리세요 ?”
“ 아프냐 ? 왜 때리는지 의문도 생겼느냐 ? 신기한 일도 다 있다. 네가 아픈 것은 어디서 나온 것이고, 의문은 또한 어디서 생긴 것이냐 ? 모두가 너 라고 하는 같은 뿌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
생각해 보니 옳은 말이다. 하지만 아직도 그로서는 의문을 품고 있던 공과는 거리가 먼 비유처럼 느껴진다.
“ 글쎄요. 아프긴 한데요, 아직 뭐가 뭔지 잘 모르겠네요.”
“ 내가 너를 때리니까 아픈 것이고, 너는 왜 때리는지 까닭을 모르니까 의문을 품는 것이 아니냐 그런데 아직도 아프냐 ??”
허둥지둥 말귀를 알아들으려고 애쓰던 순간이었다. 금방 아프던 감각이 사라지고 있다.
“ 네가 아프다고 하던 감각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왜 내가 때렸는지 의문만 마음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게 바로 공의 요체라고 하겠다. 내가 너를 때린 것은 유와 무이고, 네가 아직도 의문을 품고 있는 바로 그것이 공이다. 감각은 생겼다가 사라지지만, 마음속에 품었던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닐까 ? 유무의 문제는 이미 사라져 버렸건만 네 마음 속에는 아직 내가 너를 왜 때렸는지에 대한 의문은 남아 있으니까 말이다.”
불교에서 선 공부를 할 때 끊임없이 물고 늘어지게 하는 화두(話頭)라고 하는 것이 있다. 잘 살펴보면 이 화두가 바로 조금 전에 말한 ,
“ 왜 때리는 거야 ?”에 해당하는 말이다.
생각해 보면 정말 바보 같은 것이 이 화두인데, 그 정체가 바로 근원에 대한 의문이다.
“ 맞아서 아프긴 아팠지만, 선사가 왜 때린 것인지를 알 길이 없다.”
빈 것을 그저 빈 것으로 보는 일은 누구나 가능하다.
하지만 꽉 찬 것도 사실상 빈 것으로 볼 줄 아는 지혜안이 바로 공안(空眼/公案)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그 어떤 절대적인 것이라고 해도 영원히 불변하는 존재는 어느 하나도 없다.
하지만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절대적인 무에 해당하는 < 절대 무>는 바로 <공>인 것이다. 그래서 옛날부터 선사들은 그런 비유를 해 가면서 제자들의 머리를 쥐어박기도 하고 때리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 편으로 참으로 이상한 일이 아닌가 ?
영혼의 존재가 바로 이런 차원이나 영역에 해당하는 존재이니 말이다.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우주에서의 새로운 존재로서 인지되는 영혼이 라는 존재가 바로 정확하게 공의 실체를 일깨워 주는 빌미가 된다.
영혼(귀신)이 존재하는가를 놓고서 아무리 과학적으로 존재의 유무를 따져 가면서 살펴보아도 증명이 되지 않건만, 무수히 많은 에피소드를 통하여 그 존재는 이미 증명되어 가고 있다.
일상적인 존재의 차원을 떠나서 존재하는 것, 그것이 바로 공의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영혼은 바로 그 영역 안에서 생각해야 할 존재인 것이다. 영혼의 세계는 정확하게 공의 세계와 일치한다.
“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있다가 없다가 하는 것도 아닌 존재로서, 있다고 단정지워 버리면 이미 그 존재가 아닌 그 무엇이 바로 (공)이다.”
그러나 아마도 이런 벽에 부딪칠 것이다.
" 공이 <절대 무>라고 하면서 영혼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다는 거야 ?"
언제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서로 대립하는 개념으로만 가르쳐 받은 사람으로서는 정말로 이해하기 힘든 일일 것이나, 조금만 트인 눈과 마음으로 살펴 보면 <절대 무>란 개념은 곧 모든 시작이며 동시에 끝이기도 하거니와 가장 이해하기 쉬운 활동성향(Dynamic Activity)의 영혼 세계인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자기 마음과 머리에 한계를 느낀 게으른 제자들은 이런 말이 그저 말장난이고 잘난 척하는 사람의 헛된 망상처럼 생각하고야 만다. 만일 공이 망상이라면 선사들은 모두 사기꾼이란 말인가 ?
"이 공부를 법선(法禪 : 영혼을 다루는 법사이면서 공의 세계를 넘나드는 선사가 되는 공부)이라고 불러도 되요"
하니까 , 의아하다는 듯이 이상한 눈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지만, 위의 글을 잘 살펴 보면 이해가 빠를 일이다.
만일 그래도 개념이 잡히지 않는다면 반야심경의
오온개공도란 말을 잘 읽어 보면 이 말이 거짓이 아님을 저절로 느끼게 될 것이다.
조견 오온개공 도 일체고액
照見 五蘊皆空 度 一切苦厄
모든 존재를 구성하는" 다섯가지 요소가 모두 텅 비어있는 것"을 비추어 보고 온갖 괴로움과 재앙을 벗어났다. (출처 : '반야심경 해석' - 네이버 지식iN)
* 오온은 뭐냐 ?
色聲香味觸 thru 眼耳鼻舌身 이다.
말하자면 이 오온이란 감각이다.
照見 五蘊皆空 度 一切苦厄
/ 이 문장을 잘 해석하자면, 인간이 지닌 다섯가지의 감각이 본시부터 텅텅 비어있는 허깨비이니, 이를 깨달으면 고통이 사라진다는 뜻이다.
2006년 9월 19일 제마 법선사 김세환 합장
<참고할 만한 서적>
"중관불교와 유식불교"
일지 / 세계사 / 1992년 5월
행법의 준비를 갖추지 않아도 되는 대승불교는 제보살, 제불, 정토사상으로 일반의 사람 또는 대중을 위해서 가르침을 주고 있다.
상대적인 진리와 초월적인 진리를 구분하고 있는 대승불교가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논리나 원리가 없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대승불교는 삶의 진실을 향해서 얼굴을 돌리고, 인고와 탐구의 정신을 갖춘 구도자들의 불교이기도 한 것이다.
그 구도자들은 대승불교의 진정한 얼굴을 알기 위해서 중관불교와 유식불교를 하나의 방편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의 심원한 인간응시의 사상을 정면에서 바라다보면서 공과 마음의 해탈을 가르치고 있는데, 우리의 불교풍토에서는 매우 생소하다는 것이 저자의 판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관불교와 유식불교가 다루어져야 하는 이유는 그곳에 공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이 있고, 마음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파하고 있다.
공과 마음이 무엇이냐에 대한 답변이 이 중관불교와 유식불교를 알아야 하는 이유라고 강변한다.
중관불교는 초기불교이래 예지라는 것을 강조해왔으며 인간존재의 이법을 반야의 실천과 공이라고 선언을 하고 있다.
유식불교는 마음의 심층세계와 해탈의 심리를 탐구하여 이 양자는 대승불교의 사상의 기본틀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이 책은 보여주고 있다.
암튼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책자는 그래서 무수히 많고 영원한 문제로 거론되고 있나보다.
내용출처 : [직접 서술] 블로그 집필 - 아니다/그렇다(不然其然)
(출처 : '중관불교와 유식불교' - 네이버 지식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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