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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마신령] "승지산 산신님이 김백선 의병장이셨다니..."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승지산 약사굿당에서 저는 산신어른 한 분을 만났습니다. 잘 살펴보니 장군옷을 입고 계십니다. 말하자면 장군산이셨습니다. 장군산신은 일월산에도 계시고 임경업장군님은 속리산에도 계시고, 또 감박산에는 설인귀장군님이 계시니까 , 양평 승지산에  장군님이 계시는 게 이상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장군신 한 분이 계시는구나 하는 정도였지요.
처음 참배 이후 1 년 동안  평균 일주일에 한 번 씩 승지산 굿당에 모셔진 산신어른을 뵈면서도 그 분이 생전에 어떤 분이었는지를  몰랐습니다. 늘 말씀이 간결하시고 굿당에 사는 쥐한테도 떡을 주시라며 자비를 베푸시는 성품으로 보아 보통 분은 아니시리라 그렇게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 분이 발걸음을 옮기시는데 자세히 보니 다리를 절고 계십니다. 그래서 다리가 편찮으시다면 제가 고쳐 드리겠어요 하고 잘 살펴 보면서 여기저기 손을 보자 멀쩡하게 금새 잘 걸어 다니시는 겁니다. 정말 제 능력이 그 분의 다리를 고쳐 드렸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나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산신어른이 고맙다는 표시와 함께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사실은 의병대장이었소.."

"어느 시대인데요 ?"

" 응, 조선말기야. 승지산에 오것은 오래 되지 않았지만, 이 산뒤로 아주 넒은 지역에서 일본군과 싸웠지.. 그러다가 다리를 다쳐서 죽었어."

하시는 겁니다. 너무 가여운 나머지 그 분에게 장군복을 새로 지어드리고 굳은 결의를 하면서 성심을  다하여 성중청을 올리며 기도해 올렸습니다.
세월이 잠깐이더군요.

3 년쯤 지나서 승지산 산신이 계실 자리가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승지산 자락에다가 큰 골프장을 만드는 바람에 굿당이 사라지게 된겁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여쭤보았지요.

"산신 어른,,, 제도량이 오대산 자락에 있는데 그리로 가실래요 ?
"그러지뭐, 여기 있음, 자리도 마땅치 않고 내가 할 일도 없고 그러니 가볼까 ?"

그래서 지금 자리로 모셔드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2 년전 쯤, 놀랄 일이 생겼습니다.
승지산 굿당자리가 어찌 되었나 승지산 뒷길로 가다가 좌회전해서 홍천쪽으로 빠지는 길을 지나다 보니 오른쪽에 <김백선 의병대장 묘> 600 미터 라는 간판이 보이더군요. 평소에 안 가던 길을 가다가 겪는 일이라 너무나 놀랐습니다.

산신어른을 알게 된 이후 8년이란 긴세월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승지산 산신께서 김백선 의병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겁니다.

자신이 의병장이었음만 알리고 자기의 묘소의 위치조차 알려 주시지 않는 그런 겸양함이 너무나 가슴이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김백선 장군의 일생을 살펴 보니 의병장으로 활동하시다가 높은 사람에게 항명죄로 참수되었더군요.... 양반의 자식이 아닌 평민의 아들로서 의병장이 되어 지평(지금의 양평)의병 봉기에 나서셨던 분이 , 같은 의병들의 시기질투로 인하여 목숨을 잃으셨으니 그분으로서는 아마도 그점이 너무나 억울하고 한편으로는 부끄러우셨던가 봅니다.

그래서 승천을 하지 못하시고 산신이 되신 게 아닐까 싶습니다.

" 그렇구나, 나의 외조부처럼 잘 아는 윗사람에게  신분계급이 낮다는 이유만으로 애매한 시기에 엉뚱한 이유로 처형을 당하셨구나..."


시기질투심은 모든 걸 앗아가는구나 몸을 더욱더 낮춰야 하겠군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서산







[참고자료]


항일의병활동과 지평의 전후기 지평의병활동| 지평의병의 의의
동주 | 조회 98 |추천 0 | 2008.02.27.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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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의병활동과 지평의 전후기 지평의병활동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 정부의 부름을 받지 않고 스스로 무장한 의병이 일제 침략에 무력으로 항쟁한 민족운동. 1894년 갑오동학농민운동과 갑오개혁 그리고 청,일전쟁부터 시작된 의병운동은 1910년대 초반까지 지속되었으며, 일제하 만주, 연해주일대로 망명하여 독립군으로 전환되는 등 독립전쟁을 전개할 수 있는 인적, 정신적인 연원이 되었다. 이는 한국민족운동의 주조(主潮)로서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의 선도적 역할을 하였다.


[발생 배경]

갑오개혁, 을미사변과 이후 단행된 변복령, 단발령 등은 의병운동을 일으킨 직접적인 계기였다. 을미사변은 조선을 식민지화하려는 침략행위로서 국민들로 하여금 일제와 친일정권에 대한 적개심이 솟구치게 하였다. 의복제도를 조선의 문화적 긍지의 척도로 인식하고 있던 수구적 지식인들은 변복령 반포를 심각한 문화적 위기로 인식하였다. 단발령은 한민족의 문화적 자존심의 표상이던 상투를 제거함으로 전국민의 울분을 자아내는 등 정치, 사회,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혼란을 야기 시켰다. 사상적 배경은 유생들의 중심 이념체계인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과 일반민에 퍼져 있던 척왜양창의론(斥倭洋倡義論)이었다.




[경과 과정]

전기의병은  갑오변란 직후 지평의 안승우(安承禹)는 의병의 거사를 결정하고 모병을 시작하였다.그러나   모병이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여 거병에는 실패하였다..홍주의 안창식(安昌植), 철원의 홍범도(洪範圖) 등도 모병 단계에서 끝나고 말았다. 실질적인 거병은 1894년 7월 서상철(徐相轍)이 안동향교에서 거의한 안동의병에서부터 시작되었다 . 그리고 김원교(金元喬)의 상원의병도 1895년 7월과 8월  무력투쟁을 전개하였다.




을미사변 직후인 1895년 9월 18일 문석봉(文錫鳳)이 유성에서 봉기한 유성의병은 국수보복(國讐報復)을 기치로 시작되었다. 문석봉 외에 을미사변 직후의 의병으로는 강계의병이 있다. 그러나 의병전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큰 규모의 의병봉기는   광무황제의 단발소식과 단발강요를 계기로  시작되었다. 최초의 의병봉기는 1895년 11월 21일의 지평에서 일어났고, 그 뒤를 이어서 홍주,강릉,진주,장성,나주 등을 중심으로 이어졌다. 특히 의병전투에서 두드러진 전과를 거두어 전국의 의병활동에 영향을 준 것은 지평의병이었다.지평의병에 참여한 의병 400여명은  김백선이 이끄는 포수 출신들로 구성되어 뛰어난 전투력을 선보였다. 1985년 11월 21일 지평의병이  창의한 곳은 지평이 아니고 원주의 안창이었다. 지평의 김백선 장군이 수하의 포수 400여명을 모아서 안창까지 장소를 옮겨 의병을 일으킨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김백선 장군이 이끄는 포수 400여명은 동학 농민 전쟁 당시 맹영재를 대표로 하는 양반 유림계급에 고용되어 동학농민군을 토벌하는 전투에 참여 하여 크게 공을 세운 바가 있다 . 1894년 11월 홍천 동학 농민군을 토벌한 공로로 맹영재는 지평현의 현감이 되었고 김백선또한 절충장군이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적이 아닌 같은 조선의 백성으로 핍박 받고 수탈당하며 개, 돼지처럼 살아가던 민초들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고 죽여야 했던 김백선은 차리리 농민군의 총칼에 죽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며 가슴 한복판에 씻어 낼 수 없는 응어리를 지니게 되었으며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왜국과 청국을 끌어 들이는 부패하고 무능하고 나약한 조정과 관리들을 원망하던 차에 국모를 시해하고 단발령을 강행하던 작금의 현실에 대하여 울분을 참지 못하였다.

김백선은 단발령 소식을 듣고 군수 맹영재를 찾아가 의병을 일으키자고 하였으나  맹영재는 크게 반대하였다. 이에 김백선은 맹영재에게 말하기를 " 동학을 치고 벼슬을 얻은 것이 당신에게 무슨 영화가 되겠느냐.  영화로 알거든 그리 하여 보라.  그러나 지금의  훈련된 포군은 다 내가 힘써 모은 것이니 너의 군사는 아니다. 당당한 충의의 군사들이다. 어찌 너에게 맡겨 도적을 돕게 하겠느냐"  하고 꾸짖으며 울분을  참지 못하고 총을 관정에서 부수고 집으로 돌아와 분을 삭이며 거사를 준비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안 승우의 아버지 안종응은 이춘영에게 김백선을 만나보라고 권하였다. 이에 1985년 11월 21일 (양력 1986년 1월5일) 밤에 이춘영은 김백선의 집에 찾아가 거사에 참여하기로 결정하였다. 김백선과 이춘영은  지평에서 거사할 경우 맹영재의 방해가 예상되므로 수하의 포수들을 전부 안창으로 집결하도록 결정하였다. 맹영재는 돈으로 매수하여 포수들을 분열시키는 이간책을 쓰기도 하고 간첩들을 의병 내부에 잠입을 시키면서 의병의 창의를 방해하였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지평의 김백선 장군의 의병은 기존의 양반유림에 고용되었던 군대와 그 성질이 다르다. 조정의 무력한 양반관료들과 이들과 결탁한 일제를 응징하기 위하여 민중적 각성을 가지고 스스로 들고 일어선 의병이라는 사실에 그 의미가 크다.

지평의병이 두차례의 전투에서 커다란 승리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전부 김백선 장군의 잘 훈련된 포수들의 덕분이었다.  그리고 김백선 장군에게는 이미 양반 계급에 대한 신분적 경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민중적 각성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김백선 장군에 대하여 지평의병의 지휘부를 맡고 있던 양반유림들은 고운 눈으롤 바라보지 않았다.


지평의병이 크게 활약할 수  있었던 것은 선봉장 김백선이 이끈 포수출신 의병들이 핵심을 이루었기 때문인데도 이들에 대한 지휘부의 지원은 그렇게 충족하지 못하였다.  지평의병이 다시  충주성에 다시 입성하고자 할 때 김백선의 선봉대가 싸우는 중 보급품과 원병을 보내주기로 했던 안승우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안승우가 증원군을 보내주지 않았던 이유는 평민출신의 김백선을 미워했기 때문이다.(원광대 이동우 교수) 이에 분개한 김백선은 일본 수비대가 공격해 옴에도 전투에 참전하지 않고 항명하게 된다.

김백선은 돌아와서 안승우에게 책임을 물으려 하였으나   의병대장 유인석은 오히려 김백선을 처형하고 말았다. 이유는 평민이 양반에 대하여 불경한 짓을 했다는 것과 항명이 그 이유였다.여기서 양반과 상민의 신분관념에서 탈피할 수 없었던 의병장과 그 지도 아래 행동하는 의병 대중 사이의 모순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김백선의 죽음으로 인해 지평 의 병은 병사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호좌의병은 이때부터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전투의 중심세력이 사라진 상태에서  안승우등의 의병장을  잃고 끝내 유인석 의병부대는 해산하기에 이르렀다.



이와같이 볼때 지평의병은 김백선을 중심으로 한 포수 400여명이 실제적인 주체였다고 말할 수 있다.  동학농민의 토벌군으로 고용되었던 쓰라린 경험을 거치면서 이들은 민중적 각성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자신들의 실질적인 고용주였던 맹영재 지평군수의 방해를 무릅쓰고 의병을 일으킨 것이다. 이미 안승우가 의병을 도모 한바가 있으나 모병의 어려움으로 의병의 창의에 실패한 경험을 보더라고 김백선의 포수 400명이 맹영재의 방해를 피해서 안창으로 까지 이동하여 거병하지 아니하였다면 지평의병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임이 분명하다.

지평의병의 역사가 양반유림의 손에 기록되면서 이춘영. 안승우등이 크게 부각되는 반면 평민 김백선에 대한 평가는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지평의병이 반 민중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것은  양반유림의 유인석이나 이필희, 안승우를 중심으로 지평의병을 보았을때  그러하다.  그러나 동학을 치고 벼슬을 얻은 것이 무슨 영화가 되겠느냐는 맹영재에 대한 꾸짖음에서 보여지듯이  민중적 각성을 거친 김백선 장군과 그를 따른 400여명의 포수를  중심으로 보았을때 지평의병은 지금까지의 역사적 평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의미가 부각된다.  

지평의병은 민중적 각성을 거친 400여명의 포수들이 자신의 고용주였던 맹영재 현감의 방해와 회유를 뿌리치고 김백선을 따라 의병에 참여하였다.  배고픔을 참으며 일본군을 싸웠고 커다란 승리를 하여 전국의 의병활동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분관념에서 탈피할 수 없었던 의병 지도부와 의병 대중 계급적 갈등으로 말미암아 의병활동이 지속되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이러한 것을  교훈으로 후기 의병의 대부분의 의병장은 평민이 중심을 이루게 된다.

지평의병의 거병에는 김백선과 400명의 포군이 주체적으로 참여한 것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단지 지평의병의 지도부의 신분적 편견이 하나의 시대적 한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지평의병의 지도부 라고 할 수 있는 안승우와 그리고 이춘영의 의병정신이 없었으면 전국에 이처럼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지평(현재의 양평)의 퇴앙(退央) 안종응(安鐘應:안승우의 父)은 단발령이 내려지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수 십 자루의 창을 만들어 놓고 삭발 하러 오는 사람들을 단숨에 찔러 죽이기로 하고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을 은근히 불러 모으는 한편, 감악산에 은거하고 있는 下沙 안승우를 급히 불렀다.

下沙 안승우는 장담에서 서상렬, 이필희등과 함께 상의하길 국외로 가서 후일을 도모하고자 하는 의암 유인석의 의견에는 반대한다는 데에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 의병의 거병에 대한 방법을 논의 하고 있던 차에 부친의 기별이 있어 홍사구에게 장담의 의암선생에게 밀지를 전하게 하고 급하게 지평으로 갔다.

한편, 괴은(槐隱) 이춘영(李春泳)은 여주 곡수에 가 있다가  나라에 변(變)이 있어 위급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부인에게 조용히 말하였다.
" 내가 이번에 가면 반드시 일이 있을 것입니다."

부인이 말하기를  
" 선비의 아내로 지킬 바를 일러 주세요. "
" 내가 일이 있다면 생사를 알 수 없으니, 만약 내가 없어도 어머니를 잘 봉양(奉養)하고 어린 자식을 잘 길러 주시오." 하며 면목(面目)이 없는 듯 간단하게 이르니 부인은 그저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집을 나와 곧장 안퇴앙을 찾아가 뵙고 선후책(先後策)을 물으니 안퇴앙이 말하길
" 지금 들으니 본군 포군영수인 김백선이 군수 맹영재를 찾아가서 같이 의병을 일으키자고 하니 맹영재는 적신(賊臣) 어윤중의 사람이라 화복(禍福)의 말로써 백선을 달래는데 김백선은 분연히 말하길 " 이와 같은 대변(大變)에 이와 같은 사또가 앉아 있으니 어디로 가야 옳겠느냐. "하고는 총을 관정에서 부수고 집에 돌아와 칼을 갈아 거사를 준비하고 있다고 하니 가서 만나보는 것이 좋겠네"하고 말한다.


괴은이 그 말을 듣고 곧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백선의 집에 들리니 뜻이 같음을 안 백선은 크게 기뻐하며 술을 내온다. 둘은 의기가 투합하여 힘이 없는 나라의 설음에 밤새 울분을 토하였다.


김백선은 괴은에게 말하기를
"  맹영재에게 찾아가 거병을 하자고 하니 맹영재는 이와 같이 말하더이다. 어명없이 의병을 일으키는 것은 반역이며, 의병을 일으키더라도 싸우는 대상은 일본군이 아니고 지금은 조정의 녹을 받고 있는 관군과의 싸움이라 대의명분이 없다는 것이라고 합디다. 그러니 아무래도 이번 일에 있어 군수 맹영재가 일신의 영달을 위해 틀림없이 방해 할 것입니다. 포군 중에는 맹영재의 심복들이 많이 있으니 만약을 위해 원주 안창에서 비밀리에 모여 거병(擧兵) 하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이렇게 하여 김백선 이춘영 지평의병은 안창에서 거병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중기의병은 러일전쟁, 한일의정서, 을사늑약 등 일련의 일제의 침략정책에 항거하여 일어난 후 1907년 정미의병 이전까지 전개되었다. 중기의병의 대표적인 의병부대로는 경기, 강원도의 원용팔(元容八), 정운경(鄭雲慶) 의병부대, 경상도의 신돌석(申乭石)의병과 영천의 산남의진, 충청도의 홍주의병, 전라도의 최익현(崔益鉉), 고광순(高光洵)의병, 양서지역의 우동선, 전덕원 의병 등이 대표적인 의병부대이다. 이밖에 김하규(삼척), 박장호(홍천), 최도환(양구),이범주(양평,여주), 박석여(죽산,안성)가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중 대표적인 의병진은 홍주의병, 산남의진 등이었다. 중기의병은 전기의병의 한계로 지적되던 지역성, 학통성, 혈연성 등을 어느 정도 극복하였다.

후기의병은 1907년 7월 헤이그특사사건을 구실로 광무황제를 강제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을 체결하여 통감부의 간섭을 강화하는 한편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킴으로써 비롯되었다. 일제가 한국 식민지화를 가속화시키자 전국 각처에서 의병이 봉기하였다. 후기의병은 유생을 비롯하여 해산된 군인들과 평민, 천민, 상인, 농민 등 다양한 전계층이 동참하여 항일전을 펼쳤다. 군인출신의 의병 가담은 부대 편성과 전략에 큰 향상을 이룰 수 있었다. 원주진위대와 강화진위대의 해산군인들도 의병에 합류하거나 의병부대를 편성하여 반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지평의 후기의병은 전기의병 보다 더욱 큰 의의가 있다.


지평은 이당시 교통의 중심지였다. 분기로가 발달하여 전국각지로 부터 물자와 사람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후기 의병의 13도창의창의대진소는  지평을 군수물자와 전국의 의병을 집결시키는  곳으로 정하고 1907년 10중순부터  한달 이상을 지평에 주둔하면서 서울로의 진격을 준비하였다.  

1907 11월 7일의 구둔치 전투 그리고 11월 8일의 삼산리 전투는 의병전투사상 최대의 규모였다.  지평에 주둔하던 의병들은 조직적이고 치밀한 작전 속에서 일산분란하게 일본군과 대항하였다. 일본군의 여러차례의 기습공격에도 불구하고 의병은 최종적으로 8천여명으로 불어나 서울로 진격하게 된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후기 의병에 있어서 지평의 중요성은 매우크다고 할 수 있다.

지평에서 조직화된 13도 창의대진소를 비롯하여 후기의병은 독립전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와 활동면에서 전국적으로 확대, 발전할 수 있었다. 1908년 초 13도창의대진소의 서울진공작전은 규모와 활동에서 이전 의병전쟁과 다른 면을 보여준다. 이것은 일제의 침략야욕이 분명해짐에 따라 위기의식을 느낀 전 민중이 의병전쟁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의병전쟁은 1908년 이후 1910년대 초까지도 끊임없이 계속되었으며 국망 이후에 살아남은 의병들은 만주, 연해주일대로 망명하여 독립군으로 전환함으로써 독립전쟁을 수행하였다


이와 같이 전기 후기 의병운동에 있어서 지평의병은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한마디로 지평의병운동은 해방되는 날까지 지속되어온 항일 독립운동의 시발점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이다.




3.1만세이후 대중성을 확보한 항일무장투쟁노선

해무리 (younbok****)



<일부발췌>



충주 일대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할 때, 선봉장 김백선이 충주성을 점령하는 등 전과를 올렸으나 며칠간의 전투에서 결국 중과부적으로 패퇴하고 말았다. 김백선은 지원군을 요청했는데도 안승우가 보내주지 않아 일본군에게 패퇴한 것을 분하게 여겨 칼을 뽑아 대들었는데, 그는 평민이 양반에 대해 불경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김백선을 군률에 따라 처형했다. 이 사건은 그의 강직한 성품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김백선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의병 대중의 사기가 떨어졌으며, 이듬해 5월 장기렴(張基濂)이 거느린 정부군에 의해 패배하게 된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2013년 7월 13일 제마법사  서산 청강 장선생 김세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