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마법선도에 오신것을 환영합니다.
귀신이야기
  • 제마
  • 귀신이야기
  • 제마
귀신이야기 게시판
[제마 괴담] 정동 저주 괴담을 아시나요 ? ....

“러시아공사관에 이르는 아관파천의 길목은 신덕왕후의 원한이 서린 자리”

서울 중구에 있는  정동(貞洞)은  역사적으로 볼 때 저주라고 하는 측면에서 바라보면 유래 가 있는 지역입니다.  이곳은 조선왕조의 슬픈 여인들의 싸움이 시작된 장소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원한이 서린 장소지요.

원한 맺힌 사건의 시초는 태조 이성계가 신덕왕후 무덤을 그 자리에 쓴 다음부터지요.

신덕왕후는 1396년에 죽은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입니다. 함흥에서 얻은 정처가 낳은 아들을 제쳐두고 자기의 후사로 대를 이어보려다가 태자 방원(훗날의 태종)의 반란으로 몰락합니다. 왕자의 난으로 불리는 권력싸움이었습니다. 그리고 첩의 아들을 후계로 삼으려는데 대한 분노심이 작용하여, 방원은 무척 그녀를 저주했던 모양입니다.

태종은 즉위한 다음 도성 안에 왕후릉을 둘 수 없다는 명분으로 왕후무덤을 파헤쳐서 성북구 정릉동이라는 동북방의 삼살방(三煞方)으로 이장하고, 무덤 자리를 깔아뭉갠 다음 거기에 금표를 붙여 누구도 출입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 지역은 비교적 높은 지역으로서 나무수풀이 무성한 곳이었으며 무속인들이 저주 굿을 몰래 벌이던 자리였습니다. ( 1986년 경 덕수궁 뒷담 수리 할 때 저주용 공물과 나무로 깎은 신물이 발견된 일도 있습니다. 덕수궁과 지척 간으로 지금은 미국대사관저가 있는 자리입니다.)  

태종 방원이 일부러 청계천 수리 공사를 할 때 새로 놓은 광통교(현재의 광교) 아래 구정물 냄새 나는 다리 밑에다가 그녀의 무덤에 있던 둘레 석을 가져와 쓴 것만 보아도 강력한 적개심이 드러납니다. 아무나 다리를 밟고 영혼이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뭉개고 지나가라는 일종의 저주였겠지요. 하지만 무덤을 뭉개고 마음대로 이장하여 그런 짓을 하는 것은 상식을 벗어난 모욕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저주행위는 다시 영혼의 저주를 불렀습니다.  500년이란 세월이 지나고 나서, 아관파천이 생깁니다. 고종은 덕수궁에 있다가 정동의 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합니다.

참으로 기이한 일은 고종이 통로로 이용한 그 파천의 길목이 바로 신덕왕후의 묘가 있던 곳입니다.  아관파천이란 명성황후가 살해된 을미사변(乙未事變)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과 왕세자가 1896년(건양 1년) 2월 11일부터 약 1년간 왕궁을 버리고 러시아 공관에 옮겨 거처한 사건을 말합니다. 공교롭게도 정확하게 신덕왕후가 죽은 지 500년 되는 해였습니다. 이를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 아마도 신덕왕후는 영혼 세계에서 조선왕조의 몰락을 바라면서 저주를 계속했던 모양입니다.
고종은 5 백년이 지난 다음에 저주 받은 신덕왕후의 무덤자리를  밟고 지나갑니다.  그때 지박령이 되어 숨어 있던 신덕왕후의 영혼이 빙의하여 저주에 꼼짝 없이 걸려듭니다. 그리고 조선 땅에서는 일본의 득세로 이어지고 끝끝내 나라는 망하고야 맙니다. 신덕왕후는  500년 만에 조선을 없앰으로써 복수를 해낸 셈이지요.
그러나 신덕왕후는 아직도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



참고로 새겨 두시면 좋습니다.
이미 잘 알려진 인수대비, 장희빈, 장록수, 정난정, 조선조 말의 민 왕후 사건 같은 여성들의 출몰로 인한 왕조의 피비린내 나는 암투와 사화사건들은 사실상 그 뿌리를 신덕왕후의 원한에 두어야 합니다. 여자의 한은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리게 한다는 말은 전혀 근거가  없는 말이 아니며, 저주 염력에서 나오는 힘은 나라의 역사까지도 왜곡시킬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저주가 무서운 일인지 모르고 계셨지요 ?

....이 내용은 곧  방송으로 나옵니다. 기다려 주십시오.

2008년 제마법사  김 세환


참고: 아관파천>
http://k.daum.net/qna/view.html?qid=01JPY&q=%BE%C6%B0%FC%C6%C4%C3%B5




명     칭 정릉(貞陵)

종    목  사적  제208호  

분     류  유적건조물 / 무덤/ 왕실무덤/ 조선시대  

수량/면적  299,574㎡  

지 정 일  1970.05.26  

소 재 지  서울 성북구  정능동 산87-16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국유

관 리 자 정릉관리소


일반설명 | 전문설명
조선 태조 이성계의 두번째 부인인 신덕왕후(?∼1396) 강씨의 무덤이다.

원래의 자리는 정동에 있었으나 태종 5년(1405) 의정부에서 왕의 무덤이 모두 도성 밖에 있는데 정릉만이 도성 안에 있고, 무덤이 크고 넓다는 논란이 있어서 도성 밖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이것은 태조가 8왕자인 방석을 세자로 정한 것에 대한 방원(후에 태종)의 사적인 감정에서 비롯되었다.

태종은 무덤을 옮긴 후 정자각을 없애고, 홍수에 의해 없어진 광통교를 다시 짓는데 정릉의 십이지신상 등 석물을 실어다 만들게 하였다. 무덤을 옮긴지 수백년간 정릉은 왕후의 무덤이라기 보다는 주인없는 무덤에 불과하였는데, 현종 10년(1669)에 송시열의 상소에 의해 왕후의 무덤으로 보호하였다.

정릉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세우지 않고, 호석과 양석이 각 1쌍으로 줄어들고, 무석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왕후의 무덤에 비하여 빈약하지만 조선왕조 최초로 만들어진 왕비의 무덤이다.

조선왕릉의 무덤 제도는 고려왕릉 제도를 기본으로 하고 약간 변화시켜 만든 것이다. 정릉의 사각명등석이 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무덤인 현재 정릉의 것을 따르고 있는 것을 보면, 조선왕릉은 고려왕릉을 규범으로 삼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