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를 말려 놓을거야
역사상으로 나타난 원한령의 장애 중에서 가장 확실하게 드러나는 사례를 한가지 소개하겠다. 조선왕조 500년이란 방송 드라마에도 이미 소개된 사실이나 나중에 장조(莊祖)로 추존된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의대증(衣帶症)은 바로 이와 같은 영적 장애에 의하여 생긴 병이다.
사도세자는 궁중의 세자로서 체통을 지키는 일을 대단히 싫어했고 그런 이상행동 가운데 두드러진 것이 궁중복식을 무조건 기피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의대증이란 정해진 예복을 입으려 하면 갑자기 전신에 경련과 발작이 일어나고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증상인데 요즘으로 치면 '의복 기피증'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정신질환이다. 그런데 사도세자의 출생배경을 살펴보면 그의 영적인 장애 요인을 알 수 있다. 숙종의 아들이며 사도세자의 아버지인 영조(英祖)는 대단히 기가 센 인물로서 역사상으로도 상당히 많은 치적을 쌓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영조는 자신의 어머니가 숙종의 후궁이었던 사실에 대하여 언제나 자신의 혈통에 대한 열등감을 가졌던 인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더구나 영조의 아버지인 19대 숙종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장희빈(張嬉嬪)의 원망과 사랑을 함께 받은 인물이다. 워낙 다정다감하고 호색하던 사람이라서 숙종은 궁중애사라고 할만한 장희빈과 그 일족에 대한 사사(賜死)사건까지 보게 된다. 이처럼 숙종조에서 기사환국과 갑술옥사등 남인과 소론세력 사이의 권력다툼과 얽힌 궁중비사 속에는 수많은 원한령이 생겨난다. 그렇다면 사약을 받고서 죽은 장희빈의 원한령이 누구에게 그 악영향을 미칠 것인가는 너무도 쉽게 알 수 있다. 다름 아닌 자신의 질투 대상과 그리고 그 핏줄을 이어 받은 사람이 대상일 것이며, 사도세자의 히스테릭한 정신질환 역시 그러한 영적 빙의 현상의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역사상 유래 없는 아버지의 친아들에 대한 살해 사건이라 할, 사도세자의 뒤주 속 죽음은 영조 자신의 직계혈통에 관한 열등감과 일종의 근친자 증오가 만들어 낸 비극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 역시 정신병리학적인 지식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영적인 빙의문제가 개재된 것으로 보인다. 한 여인으로 제왕의 사랑을 독차지하려던 장희빈의 이루 말할 수 없는 애증갈등과 원한이 그녀의 애인이었던 숙종이 다른 여자를 통하여 낳은 후손(손자)에게 미친 것이다.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여자의 한(恨)이 후세에 원한령으로 출몰하면 얼마나 무서운 비극을 연출하는가를 우리는 이 사건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본인은 동시대의 인물을 다시 불러내어 당시의 상황을 재현할 수 있으므로 장희빈의 표독한 얼굴과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잔인한 말을 재생할 수 있다.
"나는 그 여자가 낳은 씨를 말려 버릴 거야"
그녀의 마지막 말이다. 그 이후 이상하리만큼 왕조의 후손이 귀해져 결국 왕권이 쇠하고 세도정치가 횡행하였는바, 뒷날에 조선왕조가 쇠퇴멸망한 원인으로 작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