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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마 역사 미스터리  “광개토대왕비는 본래 선돌이었다.”

광개토대왕비는 어느 시대의 역사에서나 우리민족의 거대한 꿈인 대제국의 건설이라는 이미지에 가장 걸 맞는 표상석이 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새겨진 글 내용 중에서 일본과 연관된 부분에서 역사왜곡의 빌미가 되는 왜곡 부분이 나타나서 몇 십년간 계속해서 논란꺼리가 되어왔습니다.
그러한 역사상의 문제 때문에 광개토대왕비의 본질적인 미스터리에 대해서는 별로 무관심한 편이었습니다.
이 비석은 참 모양새부터가 이상합니다.
고대 이집트에서나 볼 수 있는 4면의 크기가 같은 오벨리스크 (OBELISK) 형상으로 제작되었습니다. 동양의 어느 나라에 가도 이렇게 4 각 석주형상의 비석은 없으며, 특히 중국문화권이라고 하는 만주지역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조형물입니다.
그래서 장수왕을 영적으로 만나서 여쭤 본 결과, 그것이 비석이라기보다는 선돌이라고 하더군요. 옛말로 <슴독/선돌의 고대 우리말>이라고 해서 처음에는 무슨 용어인지 몰라서 한 참 해석하는데 오래 걸렸습니다.
전국 어디서나 찾아 볼 수 있는 우리조상들의 선돌, 입석(입석)이라고도 부르지요.
더 놀라운 것은 비석이 있는 찌렌성 쓰안 현 퉁거우  지역을 묶어서  장수왕 이후  왕 무덤 지역으로 선포하게 되는데 그 선돌에다가 글자를 새겨 넣은 것은 장수왕시절이고, 그 이전에 이미 돌을 세워두었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경계표시석에 해당하는 선돌이었다가 나중에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새겨 넣자 비로소 비석이 된 셈입니다.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러네요.
무덤 비석이라면 비석에 글 쓰는 부분을 평평하게 갈아놓고 거기다가 글을 새기는데 전혀 그런 흔적이 없는 것만 보아도 재미나지 않습니까 ?

2007년 3월 29일  제마  삿갓선생/ 김세환  


[광개토대왕 비에 대한 참고자료]
네이버 지식인
2sonsang (2007-03-27 15:31 작성)

1. 있는곳

414년 장수왕이 세운 광개토대왕비는 중국 길림성 집안현 퉁거우 (당시 고구려의 수도)에 남아있다.

2. 만들어진시대

고구려 시대(414년 광개토 대왕이 죽은 후)

3. 만든사람

장수왕(고구려 20대 왕이며 광개토 대왕의 아들)

4.만든동기

장수왕이 아버지 광개토대왕을 기리기 위해서 세웠다.

5. 모양

비는 커다란 각력응회암으로 된 불규칙한 직4각형의 기둥 모양으로 된 4면비로, 남에서 동쪽으로 약간 치우쳐서 세워져 있다.

6. 이름의 유래

유래는 없다고 보면 됩니다.. 광개토대왕(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 돌아가셔서 지은 것이니 말 그대로 묘입니다.

7. 유명한 이유

고구려 비석 중 가장  큰 비석임 (높이 5,3미터 X 각 4면 폭 1.5 미터)

8. 특징

각 면에 삼국의 정세, 일본과의 관계와 왕의 재위시 업적이 기록되어 있다.

9 가치

광개토 대왕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만듬비에는 글자를 새겨 놓았기에 후세에 전할 사실적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당시 사회상을 파악할수 있고, 지금까지 모르던 그 시대의 역사를 알게 해주었다는데 오늘날 고구려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10. 장수왕이 광개토대왕비를 세운 의도
네이버 지식인
2sonsang (2007-03-27 15:31 작성)


장수왕이 광개토왕비를 세운 의도와 비문의 해석에는 아직도 학계에서 의견이 분분합니다. 우리가 흔히 관심을 같는 것은 1775자의 광개토대왕비문중에서 32자의 해석에 만 관심을 기울여왔습니다. 그 내용은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身卯年來渡?破百殘??新羅以爲臣民

인데 이것의 해석은 질문에서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므로 넘어갑니다. 지금까지 광개토왕비를 막연히 묘비나 묘지(墓誌) 라고 여겨졌는데, 광개토왕비는 이전까지의 묘비와는 형식이 다르고 크기 또한 비정상적으로 큽니다. 최근 광개토왕비를 재연구한 이성시 교수는 광개토왕비의 본론 제2단의 내용을 근거로 지금까지와는 다른 광개토왕비의 건립목적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상조, 선왕 아래 무덤가에 석비를 안치하지 않고 수묘인의 연호가 뒤섞이기에 이르렀다. 다만 국강상광개토경호태왕만이 모두 조왕과 선왕을 위해 무덤가에 비를 세우고 그 연호를 적어 뒤섞이지 않게 했다.

본문의 내용은 고구려에서는 예부터 왕릉을 관리하기 위해 각 지역에서 강제적으로 사람을 징발해 수묘인으로 삼아 왕릉및 부속시설의 관리를 맡겼습니다. 이러한 제도가 광개토왕 시대에 이르러 제도상의 혼란이 일어났고 광개토왕은 비석을 역대 왕릉에 세월 제도의 혼란을 바로잡고자 했습니다. 광개토대왕비는 광개토대왕의 유지에 따라 왕릉을 관리할 수묘인의 징발과 묘지 관리, 수묘인의 전매금지 등의 내용을 자세히 서술해 비에 기록했습니다.

고구려는 건국 초부터 멸망 때까지 5부 체제를 이루었는데 이것은 자칫 왕권의 약화를 초래할 수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5부 체제는 고구려 멸망의 주요원인으로 꼽히기도 합니다. 때문에 왕릉에 대한 관리 강화는 왕권강화라는 측면에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광개토왕비의 전체적인 맥락을 파악할 때 왕릉의 유지, 관리를 위한 수묘인에 대한 역할과 책무를 기록하여 왕권의 강화를 꾀한 것이 장수왕이 광개토왕비를 세운 정치적 의도로 파악됩니다.

---끝